강간죄 적용범위 어디까지일까?

강간죄 적용범위 어디까지일까

물리적 폭력이나 직접 협박을 동원하지 않은 채 정신적 압력만으로 성관계를 한 경우도 강간죄로 처벌된다는 대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지금까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적 폭행ㆍ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강간죄를 인정해 왔다.

따라서 앞으로는 사회적 압력에 의해 성관계를 당한 경우에 대해서도 피해자 고소가 잇따를 것으로 보이며, 법원이 어느 정도의 정신적 압박까지 강간 상황으로 인정할지 주목된다. ◆ 협박정도 심하면 강간죄 성립 =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30일 성관계 사실을 남편과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주부를 협박해 여러 차례 성관계를 한 구 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내 최근 확정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가해자가 폭행을 수반하지않고 오직 협박만으로 간음한 경우라도 협박 정도가 심각했다면 강간죄나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협박을 한 뒤에 일정 시간이 지나 간음이나 추행이 이뤄진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구씨(48)는 2005년 우연한 기회에 정 모씨(34)에게 자신이 옛 애인이라고 속이고 어두운 모텔에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성관계를 했다.

구씨는 며칠 뒤 전화를 걸어 “당신과 내가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남편과 가족에게 알린다고 한다.

그 사람과 성관계를 갖도록 하라”고 협박한 뒤 정작 자신이 사진 찍은 사람 행세를 하며 정씨 집과 모텔에서 10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검찰은 구씨를 성폭력범죄처벌법상 주거침입강간(무기 또는 징역 5년 이상)과 형법상 강간(3년 이상), 협박으로 80만여 원을 빼앗은 공갈(10년 이하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심인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별다른 설명 없이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주거 침입과 공갈만을 유죄로 인정하고 강간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단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서울고법은 당시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ㆍ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처럼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것만으로는 강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우리 법원에서 정신적 협박에 따른 강간죄를 인정한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새로운 판례가 될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시차가 있더라도 별달리 상관이 없으며, 정신적 협박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야 강간으로 인정될지는 사례별 재판을 통해 확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서 여성이 혼외 성관계를 폭로당할 경우 △가족관계 파탄ㆍ경제기반 상실ㆍ간통죄 처벌 등 막대한 불이익이 예상되고 △인터넷 공개나 자녀 학교에서의 공개 등 치명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어 심리적 압박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 외국의 경우 = 강간죄와 관련해 미국 영국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등 많은 국가에서는 상대방 동의 없는 성관계를 범죄 형태별로 수위를 정해 모두 처벌한다.

우리나라에 강간과 화간만 있는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강간죄 구성 요건 중 ‘강력한 저항’이란 개념이 삭제됐다.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는 모두 처벌하며 죄질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영국도 오래전 강간죄 정의에서 ‘피해자 저항’ 요건을 삭제했다.

독일은 1990년대 중반 법 개정을 통해 폭행과협박 수위를 구별해 처벌하고 있다.

[이범준 기자]
출처 : 매일경제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7&no=28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