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이사를 앞둔 부모님에게는 아직 천방지축이던 우리 남매를 돌보면서 제법 오랜 세월 살아온 집과 짐을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사를 마칠 때까지 나는 동생과 함께 외할머니 댁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됐다. 명절이나 휴가 때면 늘 시골에 내려가 외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일이 익숙했기에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식탁에는 고기나 햄 반찬이 자주 올랐고, 프라이팬 바닥을 박박 긁어 먹을 정도로 좋아했던 떡볶이도 자주 만들어 주셨다. 장을 보러 가실 때면 나와 동생은 부리나케 따라나섰다. 엄마와 시장에 갈 때는 쉽게 사지 못했던 간식이나 과자를, 외할머니와 함께 나서면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돌아올 땐 늘 비닐봉지가 손에 매달려 있었고, 그 봉지 안에는 저녁 재료들과 간식거리들이 함께였다.
오후가 되면 외할머니는 안쪽 서랍에서 작은 지갑을 꺼내 몇백 원씩 용돈을 주기도 하셨다. 동생과 나는 용돈을 받기가 무섭게 슬리퍼를 끌고 골목을 뛰쳐나갔다. 골목을 나서면 있던 학교 앞 문구점 안은 에어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어 후덥지근했지만, 덜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눅눅한 과자 냄새가 우리를 반겨 주곤 했다. 이기면 불량 식품과 메달이 가득 쏟아지던 그 시절의 게임기와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나란히 손에 쥐고 먹던 아이스크림, 그리고 후덥지근하게 불던 바람 같은 것들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집에 돌아오면 가끔 외할머니와 친구분들이 마루에 앉아 화투를 치고 계시기도 했다. 친구분들이 가지고 오신 과일이나 간식거리들을 먹으며 구경하다 고사리손으로 슬며시 끼어들어 패를 섞어 보기도 했다. 외할머니와 친구분들은 봐주지 않겠다며 장난을 치기도 하셔서, 동생과 소리 높여 패를 무르겠다고 억지를 부린 적도 있었다. 부채질 소리, 화투패가 부딪히는 소리,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한데 섞인 그 오후의 공기는 지금도 선명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외할머니는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신 것은 아니었다. 대신 늘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물어봐 주셨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시되,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다정하게 짚어 주셨다. 돌봄이란 꼭 특별하게 돌보거나 엄하게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의 외할머니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보호자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여름을 떠올리면 그때의 감각들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부엌의 열기, 달콤한 떡볶이 냄새, 문구점 안의 소란스러움이 한데 섞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돌아보면 그 한 달이 내 마음의 향수로 남아 있는 소중한 추억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부모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조건 없이 주는 또 다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자 경험이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셨던 외할머니의 걸음은 예전보다 많이 느려지셨고, 시골에 내려가면 식사 준비는 이제 어머니가 도맡아 하셔서 예전 같은 음식 솜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배부를 때까지 사과나 복숭아를 깎아 주시고, 손수 귤 껍질을 벗겨 주시는 애정 어린 손길만은 여전하시다. 그 마음을, 그 애정을 느낄 때마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외할머니의 돌봄은 어린 나에게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또 다른 든든한 지원군과 함께한 감각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받는 법을 배웠고, 그 사랑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기반이 되었다.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보이는 기와집과 선풍기 바람이 여전히 나를 반긴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때 외할머니가 내게 해 주셨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다정한 여름방학이 되어주고 싶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