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죄개정을 위한 릴레이리포트] 1탄 “술과 약물에 의한 성폭력,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다”

 


*이미지 속 텍스트 내용입니다.

 

강간죄개정연대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법개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강간죄 개정연대회의는 5월 11일부터 매주 목요일 강간죄 개정의 필요성을 빼곡히 담은 릴레이리포트를 총 7회 발행합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릴레이 리포트 1탄]

술과 약물에 의한 성폭력,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성폭력사건은 피해자가 어떤 상태에서 누구로부터 피해를 입었는지에 따라 적용하는 법이 다르다. 폭행 협박을 구성요건으로 하는 강간죄와 달리 준강간죄는 피해자가 1)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상태에 있었는지 여부와 2)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였는지 이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따라서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졌거나 술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준강간에 해당된다.

 

상담 및 지원현장에서 준강간사건 피해자를 지원하다보면 기소조차 되지 않거나 기소가 되었더라도 무죄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이하준강간공대위에서는 심신상실 혹은 항거불능상태에서의 성폭력 피해가 어떠한 이유로 불기소 혹은 무죄가 나는지 그 원인을 알고자 하였다. 이에 2020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이하 전성협) 회원단체를 대상으로 2019년 1월~12월까지 지원한 준강간사건에 대한 사례조사를 실시하였고, 총67개소 성폭력상담소에서 음주 상태 등을 이용한 피해자 760명의 법적 결과에 대해 응답하였다.

 

준강간사건 760명 중 고소 신고한 피해자수는 511명(67%)이며, 기소된 사건은 229명(30%)이었다. 전체 피해자 중 유죄가 선고되어 가해자에게 처벌이 내려진 경우는 단 112명(14%) 뿐이었다.

 

사례조사 대상 피해자의 불기소 이유서를 통해 확인한 불기소 사유 건수(83건) 중 피해자의 상태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상태로 보기 힘들거나 24건(29%), 블랙아웃으로 보인다 11건(13%) 판단한 경우가 무려 35건(42%)에 달했으며,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이 낮고 20건(24%), 피해자의 대처 양상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도 11건(13%) 37%에 달했다.

 

무죄로 판단한 이유도 불기소 이유와 유사하였다. 무죄가 선고된 사건의 무죄 이유 건수(51건) 중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상태로 보기 힘들어서15건(29%)와 블랙아웃으로 보인다7건(14%)가 43%나 되었으며, 가해자의 고의성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아서12건(24%),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낮아서10건(20%), 피해자답지 않아서 4건(8%) 등이었다.

 

준강간사건에서의 쟁점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상태인지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하였는지 여부이며, 실제 법적진행 과정 전반에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이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울 증명하라고?

상담 및 지원현장에서 만나는 준강간사건 피해자들은 “가해자와 술을 마셨는데 어느 순간 기억을 잃었어요” , “평소 주량보다 적게 마셨는데 기억이 없고 평상시와 다르게 구토가 심하고 꿈꾸는 듯한 상태가 계속되어 약물을 탔는지 의심스러워요”, 등 자신이 기억할 수 없고, 대응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호소한다. 피해 전·후의 상황, 목격자의 증언, 사건 발생 시간대의 전화 및 문자 기록 같은 증거, 가해자와의 관계 등을 통해 맥락적으로 준강간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이며, 평소 자신의 행동패턴과 비교하였을 때와 전혀 다른 행동과 상황을 통해 자신이 동의나 거절의 의사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러나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의 상태는 피해자의 기억소실 및 피해 호소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기에 법적 진행과정에서는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의 확보와 그 증거를 어떠한 관점으로 해석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의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물적 증거인 CCTV는 신고 이후에야 확보가 가능하며, 신고여부를 고민하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면 보관기간 경과로 확보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혹여 CCTV 영상을 확보했더라도 그 영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진다.

 

피해자가 타인의 부축없이 걷거나 서는 등의 모습이 보이면 가해자들은 ‘만취인 줄 몰랐다’, ‘피해자가 의식이 있는 줄 알았다’라고 주장하며, 수사기관 또한 “범행 당시 의식상실 상태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 기억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것이라”며 블랙아웃이라고 판단하거나 “가해자가 정상적인 성관계 혹은 동의한 것이라 오인 착각할 수 있었다”고 해석되어 처벌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만취상태로 업혀가거나 끌려가는 것이 CCTV로 확인이 되면 가해자들은 “만취 이전에 동의를 받았다”, “이미 스킨십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성관계까지 나아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수사기관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전에 성관계에 동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가해자 진술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가해자의 고의성 판단도 증명하라고?

준강간 사건은 피해자가 기억하거나 대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범죄로 사건 전후 및 피해상황을 기억하는 가해자의 진술로 구조화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해자는 성폭력 발생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피해자가 만취인 줄 몰랐다’, ‘피해자가 성관계에 이미 동의하였다’고 주장하며 고의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만취상태를 이용하여 가해자가 성폭력을 했다는 고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떠한 말과 행동과 방법으로 동의를 구했는지, 피해자는 어떻게 답을 했는지 면밀히 조사하여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관계를 왜곡 혹은 편집하며 부인하는 가해자의 진술이 그대로 불기소이유가 되고 있다. 사법기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수사기관의 기록만을 토대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이 되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준강간에서의 고의는 반드시 확정적 고의일 것은 요하는 것이 아니며 미필적 고의로도 이미 충분하다. 즉, 피해자가 만취되어 있는 상태를 알고 있다면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의심할 수 있다. 피해자가 판단하고 조절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없거나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임에도 성적 행위를 중단하지 않거나 새로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가해자가 준강간의 고의를 가지고 실행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였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반드시 사건 전후의 구체적인 정황과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관계, 사건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태, 피해자와 가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적극적으로 확인하였는지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어떻게 적극적인 합의를 구하였는지 등도 면밀히 조사되어야 한다.

 

경찰의 말클럽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되겠어요?”

‘성폭력이 성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사회전반에 인식되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수사 및 재판과정의 피해자는 여전히 편견이나 통념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성폭력의 발생 요인과 대응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준강간공대위에서 조사 및 분석한 준강간피해자 중 17%가 수사 및 재판기관에서 왜곡된 인식이나 편견이 있다고 응답했고, 그 내용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태도(20%), 즉시 신고를 하지 않음(17%), 피해자답지 않음(22%), 피해자의 성이력(7%) 등 정형화된 성폭력피해자상을 가지고 있음을 이유로 들었다.

 

특히 술이나 클럽 등에서 즐겁게 놀고 마시고 춤추다가 발생하는 성폭력사건을 다룰 때는 성관계 당시에도 가볍게, 즐겁게 혹은 쉽게 동의하였을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 및 수사재판과정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클럽에서 즉석만남을 했거나 함께 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았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했으면 성관계까지 동의할 수 있다는 왜곡된 통념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처벌을 막고, 가해자들의 범죄를 방조하고 있다.

 

준강간은 동의여부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폭력은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동의에 기반해야 한다. 이때의 동의란 내가 상대방과 성관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성관계를 하고 난 이후 성관계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도 생각하여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술이나 약물 등을 이용하여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준강간 사건에는 공통적으로 ‘가해자와 성관계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피해자의 호소가 전제되고 있다. 이 전제는 준강간의 판단기준이 동의여부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이자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동의도 거절도 할 수 없던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준강간죄를 ‘동의여부’로 판단한다면 동의를 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상태를 살피면 될 뿐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했다는 것 또한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동의가 있었다’는 가해자의 주장이 심신상실된 상태에서의 동의를 포함하는지까지 파악하여 완전하고 적극적인 동의가 아니라면 성폭력으로 판단 할 수 있어야 한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여부’로 바꾸기 위해서는 법의 개정이 필요하며, 성관계 시 ‘동의’라는 개념과 동의 방법에 대한 수사 및 재판기관의 훈련이 필요하다. 성폭력이 발생한 맥락, 상황, 구조, 권력관계를 살피는 성인지적 관점의 훈련이 선행된다면 강간죄 개정에 대한 오해와 우려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완전하고 적극적인 동의’가 없었다면 성폭력이라는 사회의 인식 변화를 위한 교육이나 문화 및 정책이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의 근절은 물론 성평등한 사회에서 권리보장을 위한 가장 최우선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