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2 : 발전과정






천주교성폭력상담소,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1. 1998년 ~ 2000년 : 태동과 걸음마




1998년 10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이하 천여공)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실 ‘평화의샘’이
개소하였으며 일년 후 쉼터가 개소하였다. 천여공 부설로 시작된 만큼 이 시기
에는 가톨릭단체, 여성운동단체의 성격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회원단체로서 회원들 간의 친목도모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상담과 교육
에 있어서도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컸다. 상담은
전화상담의 비중이 높았으며 교육은 주로 성당성교육이었다.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실


민주화운동시기를 거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실천적 신앙을 지향하며 다양한 분야
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주교 여성들은 사회문제와 교회문제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여성운동과 방향성을 함께 하던 이러한 흐름은 가
톨릭교회 내에 여성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져
1993년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가 설립되었다. 80년대에 시작하여 90년대 들
어 본격화된 반성폭력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던
1990년대 후반에는 성폭력예방과 상담활동을 천주교회 안에서도 해야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이에 따라 천여공은 2년여에 걸친 준비과정을 거쳐
97년 실질적인 개소준비모임이 갖고 98년 천여공 부설 성폭력상담실을 만들었다. 성폭
력상담실의 장기 목표는 천주교회 내에 독립된 성폭력상담소를
설립하는 것이었지만 초기의 역량으로는 성폭력상담실의 자립이 어려웠다. 따라서 성
폭력상담실 실장(현재로는 소장)은 당시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이었던
윤순녀 회장이 겸임하기로 하였고 천여공 회원들이 상담소 운영위원회에 참가하여 상
담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교회 내에서 시작한 만큼 상담소 초기 활동의 주요 영역은 교회였다. 소식지를 통
해 교회 안에서의 남녀차별문제를 제기하면서 교회여성들의
기도와 여성들의 연대와 활동으로 극복해나가자고 홍보하였으며, 2000년 천주교 주교
회의 가정사목위원회와 함께 개소 2주년 기념 심포지움
“현대사회와 성”에서 교회 내 성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
다. 상담소 내에서도 정기적으로 월례미사를 드렸고 상담원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피정이 실시되었다.


재정과 인력의 부족을 자원봉사자의 힘으로 메우다


개소 당시 상담소에는 상근자가 없었다. 재정상의 문제로 소장과 실무자가 모두 반
상근인 상태로 99년이 지났고 2000년이 되어서야 두 명의
실무자가 상근을 하게 되었다. 실무자의 부재를 매운 것은 10여명 내외의 자원봉사자
들이었다. 98년 8월 개소 전 실시되었던 제 1기
상담자원봉사자 교육을 수료한 후 자원한 분들이 요일별로 상담소에 나와 훈련을 받으
면서 상담전화를 받았고, 99년 9월 제 1기 성교육전문강사
양성교육 수료자들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99년 1년 동안 상담소는 305건의 상담을 받
았는데 상담방법으로 보면 전화상담이 94%였고 이 중
171건만이 성폭력상담이었다. 같은 해에 외부로 출강한 교육은 모두 12회였는데 주일
학교의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교육이었다. 사무 분야에서도
자원봉사자가 일손을 거들었다.


첫 번째 이전과 쉼터 개소, 기관의 터를 닦다.


1999년 6월 처음 둥지를 틀었던 삼각지 성당을 떠나 상도동 성혈흠숭 수녀회의 연
수원으로 기관을 이전하였으며 그 해 8월에 상담소
설치신고를 하고, 10월 선도일시보호시설 ‘평화의샘’ 쉼터를 개소하였다. 쉼터는 20
00년 6월 서울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소속으로
설치신 고하였다. 2001년 쉼터가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실무자가 생기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독자적인 운영이
가능해졌지만 이 시기에는 상담소 부설로 운영되었다.



2. 2001년 ~ 2004년 : 안정과 모색



2001년부터 국가에서 인건비를 지원받고 그간의 경험이 쌓이면서
성폭력상담소의 기본적인 운영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상근직원이 늘어났으며 기관 소유의 사무실로 이전하였다. 상담소
의 특화사업으로 심리상담과 놀이치료를 이용한 방문상담을
시작하면서 사업의 주요영역과 대상이 교회에서 일반으로 변화하였고 일반 성폭
력상담소와 구별되는 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힘을
비축하며 내부의 역량을 키우던 시기였다.


홀로서기


2001년 0월 정부지원 상담소로 결정되어 운영비가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소장이 상
담과 연대 사업을 담당하고 교육담당 실무자 일인, 홍보
및 사무담당 일인으로 총 3명의 실무자들이 모두 상근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사업에
따라 반상근 간사를 쓰기도 하였다. 2003년부터는 김미숙
소장님과 교육부, 상담부, 홍보부 등 5명 체계로 개편되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
에서 인력을 확충하는 것에 기관의 부담은 컸지만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002년 1월 5일에는 천여공 제 10차 정기총회에서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다. 새로
들어오는 실무진들이 천여공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긴밀한 관계에서 상담소를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자립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
졌기 때문이다. 처음 상담소가 개소되면서 세웠던 장기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전세로 살던 수녀원집터가 재개발이 되면서 2003년 7월에는 사무실도 이전하
였다. 후원주점과 특별후원사업 등을 거쳐 많은 분들의
정성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방문상담, 상담소의 방향을 잡다


2000년 12월에 지원한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놀이미술치료를 위한 방문상담
’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프로젝트는
2001년부터 시작되었고 2001년 7월에서는 서울시 늘푸른 정보센터(현 서울시 늘푸른여
성지원센터) 테마사업 성폭력부분에 ‘보호시설에 있는
성폭력피해청소녀 방문상담’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 이 사업의 성과는
개소 4주년 놀이치료 미술치료를 통한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방문상담사례발표회를 통해 타기관들과 공유되었다. 방문상담 사업은 사회복지공동모
금회, 여성부, 서울시의 지원을 번갈아 받으며 계속되었고
2005년부터는 복권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다.
방치되어있는 성폭력피해아동
을 보며 느낀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이 사업이 상담소에
미친 영향을 세 분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면에서는 놀이미술치료를 포괄하는
심리상담, 방법상으로는 방문상담, 대상의 측면에서는
아동이다.


1) 심리상담
일반적으로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외부의 상담전문가나 놀이치료사에
게 사례를 의뢰하거나 연계하게 된다. 우리 상담소에서 직접
심리상담을 할 수 있었던 건 실무자 중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한 상담심리사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동놀이치료와 청소년과 성인 심리상담을
상담소 내부에서 소화하면서 수퍼비젼도 강화되었다. 기관의 주도하에 월 4~5회 수퍼
비젼이 이루어지면서 개별 상담자의 임상경험이 쌓여 가는 만큼
그 경험이 기관에도 함께 축적될 수 있었다.


2) 방문상담
저소득층 및 소외계층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방문하여 놀이치
료 및 심리상담을 하는 방문상담은 역량을 갖춘 상담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수료하고 상담을 전공하거나 상담을 하고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교육을 개발했으며 정기적인
보수교육과 수퍼비젼을 통해 전문 인력을 양성해왔다. 8년의 사업을 통해 배출된 인력
들은 방문상담원계약이 종결된 후에도 사회복지나 상담,
성폭력상담소에 일하고 있어 기관 간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방문상
담 사업을 통해 연계된 복지관이나 공부방, 쉼터 등도 사례
진행시 함께 논의가 가능한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3) 아동
아동의 경우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성폭력피해 이후 면접단계나
심리상담 단계에서도 지원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아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동발달이나 심리적 상태, 성폭력피해 후유증이 나타
나는 증후, 성폭력피해 외에 환경적 어려움에 대한 대처방법,
부모 상담 등에 대한 정보를 경험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성
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피해로 고통 받는 아동들을 지켜보면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3. 2005년 ~ 2007년 : 도약과 혼란




2005년이 들어오면서 두 가지 큰 프로젝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3년 동안 진행된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사업’과 ‘저소득층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센터’를 통해 인건비와
사업비가 확보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그간 하고 싶었던 많은 사업이 시도되었고 상담지원체계가 개선되고
교육활동이 급격히 늘어나는 등 가시적인 성과와 함께 내적인
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인력과 활동이 급격하게 확대된 만큼 조직 정비
에 투자되는 에너지가 컸고 덩치가 커진 만큼 시행착오를
바로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기관의 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실무자들의
소진이 컸다.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사업


2004년 10월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테마사업에 선정된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
사업’이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담인력
1인과 사업비가 3년 동안 지원되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담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학대피해아동의 사회적 서비스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 동작구 아동성학대 지킴이단 발대식 및 활동, 아동성학대 예방과 대처를 위한 교사교육사업, 정책 간담회, 아동성학대 예방과 대처를 위한 교사 지침서 및 실무자 지침서 제작 및 배포, 아동성 학대상담원 업무지침서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진행하면서 성폭력상담의 전문성에 대한 고민도 함께 진행되었다. 기존 상담소의 상담
과정에서 위기지원과 심리지원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반성과 함께 사례지원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하고 개별 상담원들이 한 사례를 모
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적인 역할을 가지고 상담원들이
함께 하나의 사례를 지원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상담원들의 전문성
을 높이는 동시에 소진을 방지할 수 있었다. 상담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할을 중심으로 한 체제개편이 가능하였다. 상담소에서 할 수 있는
지원과 할 수 없는 지원을 분명히 구별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지원이 가능한 기관을 확인하고 연계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부설 성교육센터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 사업으로 선정된 성교육센터는 저소득층 청소년과 아동을 주
요대상으로 하여 2005년 3월부터 2008년 3월까지
10명이 인건비를 지원받았다. 센터 10명, 아동성학대전담인력 1명, 기존에 있던 상담
원 5명까지 상담소는 16명의 실무자로 가득 찼다. 장소와
일할 책상과 컴퓨터를 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개별 사무실을 얻었다가 다시 상담소로
들어오는 등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인력 확보
측면으로 보면 단연 기회였다. 센터의 직원들은 성폭력상담원과 성교육강사로 훈련을
받았고 센터와 상담소 업무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3년의
사업기간 동안 총 1,280회의 교육을 하였으며 교육을 나간 수많은 기관과 새로운 연대
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2003년 이후 시작되었던
집단상담식 성교육을 좀 더 변화 발전시켜 성매매, 성폭력피해자, 성폭력가해자, 미혼
모, 가출 청소녀 등 특수집단성교육을 진행하였고, 대상의
성격이나 연령에 따른 교안을 작성하여 경험과 연구의 결과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러나 3년의 활동을 통해 이후 센터를 유지할 수 있는
인력과 재정을 확보하려 했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
함과 낮은 급여, 기관 확장 단계에서 생긴 업무역할의 혼란
등으로 생긴 갈등 등이 어려움 중의 하나였다.


연대활동과 지역활동에 힘을 쏟다



여성단체로서의 정체성이 컸던 첫 번째 시기(1998~2000)에
비해 전문성을 강조하며 사업을
키워가던 두 번째 시기(2001~2004)는 외부활동이 제한적이었다.
2005년에 들어서
며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실무자들이
늘어나면서 소장이 실무영역 외에 다른 영역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성폭력 예방과
대처과정에서 사회적 인식과 법, 정책의 중요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통합적 지원을 강조하며 사례관리를 시도하다보니 사례지원에서도 지역사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김미숙 소장님이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 청소년위원회 위원을 맡으면서 정책제언과 사회홍
보활동에 좀 더 힘을 기울였으며 상담소 차원에서도 기관이 위치한
동작구 내 경찰서와 간담회를 가지거나 여성폭력단체들과의 연계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의 활동을 해나갔다. 동작구 내에 지킴이단에 동의한 000개의
약국과 문구점에 스티커를 부치고 안정장소로 활용하고 이를 학교교육에서 홍보하는
식의 사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활발한 지역 활동을 통해 발견된
지역 내 학대피해사례나 성폭력사례가 상담소에 조기신고 되고 이후 지역단체나 사회
복지사, 동사무소 등과의 협력을 통해 피해아동과 가족을 여러
방향에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4. 2008년~ : 선택과 집중




인건비와 사업비가 지원되던 프로젝트 사업이 종결되었다. 사업은
축소되었으나 성과는 상담원 개개인과 상담소에
축적되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10년의 성과와 한계


1991년 1개소였던 성폭력상담소가 2008년에는 200여개소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지원서비스를 비교적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운영주체나 상담소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담소에 따라 운동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인식 개선이나
정책제언, 반성폭력 운동을 주요하게 펼치기도 하고 사회복지전달체계의 하나로 상담
서비스만 강조하기도 한다. 법률 제정과 정부의 운영비 지원을 통해
상담소들이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면서 각 상담소의 활동이 지도점검의 이름으로 통제
되는 경향도 보인다. 여기에 더불어 정부주도의 아동성폭력전담센터,
원스탑지원센터 등이 확대되면서 민간 상담소들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의 10년사를 돌아보면 가톨릭여성운동단체에 기반을 두고 시작
하였으나 ‘운동성과 종교색은 약화되고 전문성은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성폭력상담에서 운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
조되어도 모자람이 없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시각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개소 초기의 문제의식 또한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운동성의 약화는 여전히
우리의 한계로 남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상담소에
요구되는 것들을 모두 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껏 우리는 ‘개개인의 내담자를 전
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를 다른 상담소들과 공유하고 타 상담소들과의 긴밀한 연
대 속에서 운동성을 견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앞으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2007년 10월과 2008년 2월에 모든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상담소 조직체계가 정비되
었다. 성교육센터가 정리되면서 교육 사업은 대폭
축소되었지만 사례관리자, 지원상담자, 심리상담자 등 역할을 중심으로 개편된 사례관
리체계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6명의 실무자가
상담소에 남았다. 매해마다 운영비를 확보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뜻이 있으면 길
이 있는 법. 앞날을 걱정했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다.

건강한 상담자가 내담자를 돕고, 행복한 실무자가 기관의 미래를 만든다. 그래서
2008년,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행복한 실무자, 건강한
상담자 만들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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