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죄 개정을 위한 릴레이리포트] 4탄 “청소년으로 겪은, 원치 않은 성관계”

 


*이미지 속 텍스트 내용입니다.

 

강간죄개정연대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법개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강간죄 개정연대회의는 5월 11일부터 매주 목요일 강간죄 개정의 필요성을 빼곡히 담은 릴레이리포트를 총 7회 발행합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릴레이 리포트 4탄]

 

청소년으로 겪은, 원치 않은 성관계

 

“법은 우리가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고 사고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나라 법에서 성폭력은 ‘폭행과 협박, 피해자의 저항’을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상호 동의가 없었더라도 폭행과 협박만 없으면 성적 접촉을 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을 전파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청소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위협적인 가해자가 있었다. 피해자와는 고등학교 동급생이자 과거 사귀던 사이였다. 사귀는 동안 가해자는 동의를 구하지 않고 피해자의 몸을 만졌다. 성적 접촉을 내켜 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전 애인은 잘 대줘서 좋았는데 걔랑 더 할 걸 그랬다”고 말하며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헤어졌지만 가해자는 헤어진 이후에도 성폭력을 지속했다. 심지어 사귈 의사도 없는 피해자에게 “몸 사진을 보내주면 다시 사귀어 주겠다”며 회유하고, 설득하고 위협하기를 반복했다.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던 가해자도 있었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공부를 곧 잘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다가왔다. 피해자는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친절히 공부를 가르쳐주는 가해자가 좋았다. 그런데 가해자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의 친구 관계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휴대폰을 훔쳐봤다. 나중에는 몸 사진을 요구하고 성관계 영상을 찍게 시켰다. 처음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던, 피해자가 좋아하던 가해자는 그렇게 성폭력을 했다.

둘 다 원하지 않은 성적 접촉으로 인해 성적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였고, 자신의 침해된 권리를 구제받고자 제도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황당한 질문들이었다. ‘그런 행동이 싫은데 왜 계속 사귀었니?’, ‘그런 애를 왜 만났니?’, ‘그렇게 했는데 가만히 있었니?’ 두 사건 피해자들은 주변 어른들과 수사기관에 자신이 당한 피해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에 지쳤다.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해코지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살 수밖에 없다.

폭행이나 협박 정도는 해줘야 강간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우리나라 법은, 사건 당시 내가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가해자의 공격성을 입증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피해자는 분명히 폭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법은 폭력이 아니라고 하니, 가해자는 무고를 외치며 당당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제로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설문에서 ‘모텔에 들어간 것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설문 참여자 20대 중 남성 절반 가까이가 그렇다고 답했다. ‘연인과 모텔에 가는 것은 암묵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설문 참여 남성 80%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성관계는 말 그대로 ‘관계’를 전제로 한다.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의 주장, 욕구를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하고 조율하면서 합의를 하는 과정이 필수다. 서로 간의 경계를 존중하고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성관계도 마찬가지다. 동등한 관계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합의하는 것이 성적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성적 접촉을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을 권리를 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하며, 동의하였다고 해도 어느 한쪽의 마음이 바뀌면 멈춰야 한다.

국제 사회는 이미 ‘동의’를 기준으로 성폭력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이 기준으로 바꿀 것을 권고하였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UN CEDAW)는 2018년 우리 정부에게 “형법상 강간을 폭행, 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하지 말고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두도록 시정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동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국제 사회에서 정의한 기준이 있다. 이스탄불 협약(여성폭력과 가정폭력 예방 및 퇴치를 위한 유럽 평의회 협약)*** 제36조에 따르면 “동의란 주변 상황 문맥을 고려한 당사자의 자유 의지의 결과로써 자발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고 명시적 동의가 없는 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동의’를 기반으로 한 강간죄 개정 움직임은 전 세계적 추세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회가 변했다. 성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금욕을 강조하던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을 통제하던 시대는 지났다. 성교육을 통해 건강한 성인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가르쳐도, 온라인에서는 성과 관련한 잘못된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는 불법적인 성표현물과 성착취물을 온라인을 통해 쉽게 접하고 있다. 포르노그라피에서는 성폭력을 성관계로 오인하게 하는 내용이 많고, 이는 청소년들의 성적 행동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보의 편향으로 인해 왜곡된 통념이 형성되고, 나아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 강간죄 기준이 ‘동의’로 바뀐다면 청소년들의 성적 침해를 예방하고, 피해 발생 시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늦었지만 폭력을 폭력이라 하지 않는 법과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동의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 기존 문화, 특정 연령대가 처한 환경 등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고려하여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한다. 동의에 대한 논의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존중받기 위한 환경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확장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동의 문화를 지지하고 강간문화를 해체하기 위한 출발점에 선다****.”

*밀레나 포포바 (2020), 함현주 옮김, “지금 강조해야 할 것: 성적 동의”, 마티, 29쪽.

**“모텔=성관계 동의? 남성 ‘긍정’ 여성 ‘부정’ 많았다”, 서울신문, 2022. 8. 13.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813500016)

***여성폭력과 가정폭력 예방 및 퇴치를 위한 유럽 평의회 협약(Council of Europe Convention on Combating Violence Against Women and Girls and Domestic Violence, Istanbul Convention)은 “여성 폭력에 맞서는 포괄적인 법적 프레임워크 및 접근법을 제정한” 법적 구속이 있는 최초의 문서이다. 가정폭력 예방, 피해자 보호, 가해자를 기소에 초점을 둔다.

****밀레나 포포바, 같은 책, 25쪽.

글쓴이: 탁틴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