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1 : 대표인터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이사 41.10)




Q)
올해로 기관이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소감이 남 다르실 텐데 어떠신가요?



10년이라는
시간이 참 빨라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실감이 안나요. 시편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10년이 너무 금방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 동안 우리가 집을
세 번 옮겼는데 그 생각도 나고. 지난 10년은
정신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Q)
기관의 태동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하셨는데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과의 만남




92년에
정대협 할머니 문제가 처음 신문에 났는데 그때 나는 필리핀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였어요.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는지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정대협 사무실이었어요. 그 때 정대협도 힘들 땐데
찾아가니 너무 반가워하더라고. 천주교에서도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함세웅 신부님께 부탁해서 할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자고 했지요.
내 생각에 그걸 해 드려야할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돈도 모아서 그 해 말에 아현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할머니 20여분
이 오셨고 신부님도 여러분 오셨어요. 93년도에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가 만들어져서 정대협 사업을 함께 하게 됐죠. 그러다가 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를 가게 되었고 한 1년 동안 같이 가는
사람들과 여성대회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 그룹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얘기가 교
회 안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삼각지
성당 방 한 칸에서 시작하다.




97년도에
그 얘기가 좀 더 가시화되면서 천여공 부설로 성폭력상담실이 출범하게 되었지요. 상
담이야 방에 전화 하나 두고 하면 되는데 교육 장소가 없는
거예요. 함세웅 신부님께 의논을 하니까 삼각지 성당의 박은종 신부님을 찾아가 보라
고. 그래서 갔더니 너무 쉽게 ‘쓰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돼서 오히려 걱정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걱정을 하니깐 성당
은 누구에게나 열린 하느님이 주신 장소라고, 특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열린 곳이니까 쓰라고. 그래서 주중에만 쓰는 조건으로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 컴퓨터 하나 두고 그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교육실
빌리러 갔다가 사무실까지 된 거죠. 98년 6월에. 그리고 이제 실무를 해야 하는데 막
막하더라구요. 그래서 천주교여성공동체 이름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공문을 보냈어요. 그러니까 당시 소장이었던 최영애 씨가 직원들
한테 물어본 거지.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할 사람 있냐고. 아마
월급은 어려워도 교통비정도는 줄 거라고. 그래서 오게 된 사람이 김미숙 선생님이예
요. 김미숙 선생님이 오면서 실무자가 생기고 장소도 생겼으니
박차를 가해 가지고 교육도 시작하고. 1기 교육이 끝나는 날, 개소식을 했어요. 그래
서 시작한 거는 더 먼저였지만 우리 생일이 10월 29일이
된 거죠.





박은종 신부님에 대한 아픈 기억




박은종
신부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하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분이니 마음이 참 슬퍼요.
신부님께 참 고마운 게 당시 우리가 실무자랑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근근히 최소한의 경비로 운영하고 있을 때인데 종종 사무실에 들러서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시고서는 그냥 봉투를 놓고 가세요. 열어보면
5만원도 들어있고, 10만원도 들어있고. 그런데 성당 분위기가 참 험악한 거예요. 그래
서 왜 그런가 하고 했더니 성당 신자들이 신부님한테 불만이
좀 있었던 거예요. 신부님이 오자마자 성당 안에다 노숙자들이 잘 수 있는 쉼터도 만
들고, 성폭력상담소에 방도 빌려주고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남들이 생각할 때 성폭력상담소 그러면 더러운 단체 이런 게 좀 있었고, 게다가 노숙
자 쉼터는 낮에는 동네할머니들 와서 지내는 건물인데 밤에
노숙자들을 데려와서 자게 했거든. 그 때가 IMF 터지고 나서 얼마 안 지났을 때라 서
울역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니깐.


그러다가
99년 3월 달에 신부님 발령이 휴양으로 나온 거예요. 본당 오신지 일 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강원도 상동 공소에 계시다가
2000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어요. 우리 때문에 삼각지 성당을 떠나신 것 같아서 늘 마
음이 무겁고 아팠죠.




수녀원의
도움으로 두 번째 집으로 이사가다




박은종
신부님은 가시면서 우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후임신부님께 다 얘기해 두겠다고 그랬
었지만 오신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사무실을 비워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여기저기 부탁도 하고 매달려 보기도 하던 중에 다행히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수녀님들이 도와줘서 상도동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지요. 워낙 수녀원 수련소였는데 집도 크고 마당도 넓은 그 좋은 집을 6000만원에
빌려줬어요. 2000만원은 어떻게 융통을 하고, 나머지는
내가 전세를 빼서 이사를 왔지요. 99년 6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상도동에서 살았어요.
99년 겨울에 그 집에서 정말 너무 고생을 했어요.
그 집이 엄청 컸는데 독일식 기름보일러 난방비가 300~400만원이 든다는 거예요. 그
때 우리가 기름값이 어디 있어. 먹고 살 것도 없는데.
그냥 떨고 살아야지. 낮에는 실무자들이랑 함께 있어도 밤에는 나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정말 그 해 겨울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게 정말
하느님의 역사라는 게 그 너무너무 추운 겨울에 떨면서 지내는데, 저희 교육을 받으셨
던 박선과 신부님께서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군대
간 아들을 위한 미사를 부탁드리면서 봉투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 때 우리 생각이
났다고 그러면서 그 분을 모시고 우리 집에 오신 거예요.
가시고 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거기에 200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그 해 성탄선물이었죠
. 우리에겐.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돈이었죠. 그 돈으로
기름 넣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 쓰면서 첫 해 겨울을 났어요.




쉼터
개소, 그리고 세 번째 이사




처음에는
집도 실무자도 없어서 쉼터를 하는 건 생각도 못하다가,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까 공간도 생긴데다 서울시에서 한번 와서 보고는 쉼터를
빨리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99년 10월 25일에 쉼터 개소를 했고 2000년이 되면서
한두 명씩 사람이 오기 시작했죠. 그때는 돈도 없고
쉼터 실무자도 없었으니까 낮에는 상담소 실무자들이 함께 있고, 밤에는 나랑 있고.
참 고생 많았던 때였어요. 김미숙 선생님도 정말 고생했고. 그
때가 우리가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으니까. 쉼터 운영을 위해 실무자가 꼭 있어야 하겠
는데 돈도 조금밖에 줄 수가 없고 하다 보니 어떻게 인연이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2000년 겨울까지 두 해 겨울을 제가 혼자 지내다가 2001년에 정
부보조금이 나오면서 실무자를 쓰게 되었고 그 때부터는
조금씩 정상적인 괘도에 올라가게 된 거죠. 2003년 7월에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좀
더 안정이 된 거고. 이후 5년 동안은 무난하게 왔던
것 같아요. 김미숙 선생님이 건강 때문에 갑작스럽게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만두
게 된 게 큰 일이였지만 또 그만큼 우리 기관이 내공이 쌓여서
윗사람이 하나 없더라도 받쳐줄 수 있을 만큼 인력확보가 됐다는 게 또 감사한 일이죠
. 그렇게 꾸려나간 김미숙 선생님 덕이기도 하고.




Q)
오랫동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하셨는데 여성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으셨
나요?




87년
유월항쟁이 지나면서 그 후유증이었는지 당시에 내가 몸이 많이 아팠어요. 어느 날 성
서를 보다가 그날따라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건
뭐 수도 없이 읽었던 건데 그날따라 내 눈에 왜 여성이 그 카운트에 빠졌을까 그런 의
문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구약책을 읽으니 여성억압의
역사고,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이 성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이 있었죠. 그러다가 8
9년에 6월에 미국 메리놀 신학교에서 열리는 여성신학
심포지엄에 초대가 된 거예요. 거기서 참 충격이었던 게 신학교 학장이면 남자 신부일
줄 알았는데 숏팬츠에 젋은 여자가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사람이
학장이라는 거예요. 예전에 수녀였다가 그만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참 놀랍더라구요
.


그러던
중 심포지엄에서 요한복음 4장을 강의를 듣는데, 예수님이 정오에 물을 뜨러 나오는
여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 물을 잡숫고 싶다고 그래요. 그
여자가 ‘지체 높으신 분이 이렇게 하찮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니까
‘나는 너의 신분을 다 알고 있다. 너는 이미 6번 결혼했고
너의 남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다’ 그러시죠. 여자가 놀라서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냐고 하니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해요. ‘나는 네가
찾고 있는 메시아다.’ 여자가 그 얘기를 듣고 뛰쳐나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근데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신학자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거듭나야 합니까
’ 하고 계속 물어 보는데도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히지를
않아요. 사실 요새로 하면 낮에 물 뜨러 나오는 여자는 성매매여성이거든요. 예수님이
당신이 메시아임을 처음 밝히는 상대가 바로 그러한 여자였던
거였지. 그 강의를 듣는데 갑자기 내 안에서 뭔가가 막 끓어 오르더라구.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잘난 신학자가 아닌 여성에게 와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듯이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서 밝혀주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눈감고
있구나! 예수님이 오늘 내게 이걸 알려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너무 신났죠, 이제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내가 성서에서 느꼈
던 의문이 풀리면서 90년대부터는 한국에 들어와 여성신학과
여성학공부를 하고 미친 것처럼 일을 했죠.




Q)
처음 상담소나 쉼터를 만들던 시기에 가졌던 바람이나 저희 기관 이름이 표방하는 바
를 생각한다면 사실 종교성이 좀 더 강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현재 기관의 모습이나 하는 일을 보면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부터
구성원을 천주교신자만 뽑아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중심으로 간다면
협소해질 거라고 생각했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이름을
걸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공동체에서 필요로 하는 일, 약자와 함께 하는 일을 한다면
그게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만 교회내 성폭력은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며 늘 고민하고 있죠.




Q)
이름이 천주교성폭력상담소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희가 다른 상담기관에 비해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에서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
기관이 가톨릭사회복지회에 소속되어 있으나 교회조직 안에 들어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조직적인 개입을 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에 있기 때문에 강점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천주교에
근원을 두고는 있으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은폐하거나
두둔하는 건 없습니다. 해서도 안 되는 일이구요. 개소 2주년 되는 해에 천주교 가정
사목위원회와 함께 ‘현대사회와 성’이란 주제로 심포지엄도
개최하고 논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그 때 그 때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일
을 하다 보니 오히려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이슈화하고 다루는
일이 지연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상담소 내부의 역량이 모자라는 부분도 있고요.
우리가 다른 성폭력상담기관과 다를 수 있으려면 이론적으로도
무장이 되어야겠지만 구체적인 사례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교회 조직에 대한 이
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개입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고,
회칙이나 교서 등을 근거로 하여 대처할 수 있는 논리 또한 연구되고 토의되어야할 거
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게 앞으로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Q)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천주교성폭력상담소와 평화의 샘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지어진건가요?




처음에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부설로 시작했으니 자연스럽게 천주교성폭력상담소라고 짓게 됐죠.
메리놀외방전교회의 하유설 신부님이라고, 당시 자문위원이시던
신부님께서 요한복음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문구를 따서 ‘평화의 샘’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는데
다들 찬성해서 그 이름도 함께 쓰게 됐고요.


처음에
우리 상담소를 홍보하고 다닐 때 이름이 그게 뭐냐고. 천주교가 성폭력만 하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 신부님들도 있었어요. 천주교는 성폭력과
무관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천주교에
서 금기시되는 논의가 성문제, 독신문제 등인데 이것에 대해
얘기하면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들을 해요. 그건 아니죠. 교회의 주인은 사람, 즉 평
신도들이거든요. 이게 다 종교라는 도그마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이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나갔네요.


여하튼
지금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상담소는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쉼터는 ‘평화의 샘’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상담소와 쉼터 모두를
통칭하여 ‘평화의 샘’으로 부릅니다. 앞으로 법인이름으로 쓸 생각이기도 하구요.




Q)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시면서 힘든 것도 있고 좋았던 것도 있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길을
만드는 것은 참 힘든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건 집을 구하러 다니던 일이예요. 세
차례에 걸쳐 집을 구한다고 길거리를 헤매면서 항상 ‘하느님
우리가 어디서 이 일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곤 했어요. 젊어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못할 것 같아요.


좋았던
건, 쉼터에 오랫동안 있었던 친구가 결혼한 것이에요.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
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부모도 없고 글자도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와서 호적도 만들고 이름도 다시 만들고, 다시 태어난 거죠. 그 힘든 시기 잘
견디고 이제 가정을 가지고 살면서 때 되면 찾아오고 그런
게 너무 이쁘고 보기 좋아요. 기쁨이죠.




Q) 앞으로의
계획이나 생각하는 방향이 있으시면 얘기해주세요.




상담소와
쉼터가 함께 사단법인을 만들 예정입니다. 법인이 되면 현재 있는 집처럼 기관이 가지
고 있는 재산도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관리될 거고 공동체의 틀
안에서 상담소나 쉼터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상담소는
현재 전문성을 많이 인정받고 있는데 현재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
는 것을 물론이구요. 방문상담처럼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방식의 상담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쉼터
같은 경우에는 현재 쉼터가 청소년쉼터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밖에 있을 수 없
거든요. 청소년의 자활이란 결국 중고등학교를 잘 다니게 하고,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를 통해 사회에 건강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일 텐데 그들이
정말 홀로 설 수 있기 위해서 지금 쉼터만으로는 부족하죠,
앞으로 혼자 자립하기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자립관 같은 개념의 중간집을 만들고 싶
어요. 아이들이 삶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도우미 역할을 해 주는
그런 공간이면 좋겠어요.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10년을 돌아보면 하느님이 저희 곁에 있으
셨다고 느껴집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제껏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 일은 혼자 하는 일
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관심 가져주시는 많은 분들과
함께 해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윤순녀 대표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 회 장, 민통련 중앙위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공동대표,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 한 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셨으며 현재 평화의샘 쉼터의 시설장과 기관대표로 일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