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주제 글쓰기] 수수팥단자 한 접시

수수팥단자 한 접시

 

글_마녹

 

 

활동가들과 음식에 관한 글을 쓰자고 이야기를 해놓고도 오랜 시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에게 힐링이 되는 음식이 있나? 특정한 음식에 담긴 에피소드가 있나? 떠올려봐도 그저 일상적인 것 밖에 없었다. ‘이번 글은 망했구나’ 생각하던 즈음 어슴푸레하게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우리 가족들의 생일은 주로 겨울이다.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엄마의 생신 일주일 후가 올케의 생일이고, 양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오빠의 생일 이틀 후가 내 생일이다. 어느 해에는 오빠와 나 사이에 엄마의 생신이 있기도 했고, 어느 해에는 내 생일 이틀 후가 언니의 생일이기도 했다. 오빠의 결혼 직후에는 가족끼리 친해질 겸 서로서로 생일을 챙기느라 하루는 외식, 하루는 집에서 조촐한 생일 밥상 등으로 축하하며 지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일정을 맞추고 식당을 예약하고 누군가는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를 사는 것 또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수고로움이기에 이제는 엄마 생신에만 같이 식사를 하고 다른 식구들의 생일은 서로 챙기지 않고 있다.

 

어릴 때는 어땠었나 떠올려보니 그때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로 4남매를 키우신 할머니에게 첫 손주인 오빠는 매우 귀한 존재였고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는 늘 오빠였다. 심지어 며느리보다 손자의 생일을 더 챙겼고, 당연히 내 생일은 뒷전이었다. 지금 아무리 떠올려봐도 엄마의 생신을 어떻게 지냈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슬프게도..

 

예전에는 어릴 때 아이에게 오는 재앙을 막는다는 의미로 아이 생일 때마다 수수팥단자를 만들어서 10살이 될 때까지 주었다고 한다. 우리도 생일이면 수수팥단자를 먹었다. 다만, 손자와 손녀가 연달아 생일이 있으니 우리 집은 늘 오빠의 생일에 수수팥단자를 하고 한 접시를 남겨두었다가 내 생일에 주었다. 지금이야 냉동고에 잘 넣어두었다가 먹기 몇 시간 전에 꺼내면 새로 한 떡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겠지만 그때는 떡과 같은 것들을 냉장고에 넣는다는 것은 생각도 안 하던 시절이었다. 찹쌀에 팥앙금이 묻혀 있는 수수팥단자는 이틀이 지나면 딱딱해져 그 쫀득함이나 팥의 달콤함을 맛보긴 힘들었다. 오히려 꾸역꾸역 먹고 체하기가 쉬운 음식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며칠 만에 다시 떡을 만든다는 것은 할머니나 엄마에게 너무 고된 가사노동이고, 내가 떡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어린 내게 그 상황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불공평함이었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에서 덕선이가 언니랑 생일 따로 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같이 해주냐고 말을 하는 그 장면이 바로 내가 느끼는 심정이었다.

 

수수팥단자 한 접시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 나의 일상은 늘 우선순위인 오빠가 무엇인가를 하고 남았을 때 순서가 돌아왔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 한 집에서 유치원을 보낸다면 오빠만 갈 수 있고, 자전거를 사줘도 오빠만 사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빠가 유치원을 가고, 학원을 가고, 스케이트를 타는 동안 나는 오빠의 유치원 소풍을 쫓아가고, 학원 행사를 쫓아가고, 스케이트 타는 오빠를 구경했다. 차별이 뭔지 불공평함이 뭔지 몰랐지만 오빠에게만 해주고 나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싫었고, 누구한테라도 문제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엄마에게 왜 오빠와 나를 차별대우하냐는 뉘앙스의 편지를 써서 화장대에 놨던 기억이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 집의 주도권이 할머니에게 있었고, 할머니의 남아선호에 대해 어떠한 발언권도 없었던 엄마 또한 불평등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부장제에 젖어있는 집에서 남매에게 차별이 일상화되었던 상황을 그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처럼 우리 집에서도 차별이 일상화되었고, 엄마도 며느리라는 이유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가사노동과 육아의 힘겨움 속에서도 발언권도 경제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수수팥단자 한 접시 같은 에피소드는 웃고 떠드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를 장막처럼 가로막았던 우리집의 가부장성은 앙금처럼 나에게 머물다가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어 사람들을 이해하고, 더 크게 가부장제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음식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로 해놓고 우리 집의 가부장성과 남녀 차별의 글을 쓰고 마무리하는 상황이 조금 낯설다. 다음에 다시 음식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는 힐링푸드, 인생음식점 같은 것이 나의 글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