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샘공동체 25주년 새로쓰기 인터뷰] 노동자의 삶에 눈뜬 청년,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여성의 곁에 서다

1. 윤순녀 사단법인 평화의샘 대표이사: 평화의샘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노동자의 삶에 눈뜬 청년,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여성의 곁에 서다”

 

평화의샘 공동체 25년 역사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면서 다양한 생존자들과 함께해온 과정이다. 평화의샘은 한국사회의 모든 변곡점에 여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있음을 보면서 활동가와 생존자로서 깨어나고 성장해왔다. 2023, 평화의샘 공동체 25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평화의샘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활동가들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사단법인 평화의샘 상담공간에서>

 

노동자의 삶에 눈뜬 청년 윤순녀

 

평화의샘 공동체의 시작은 가톨릭 안에서 노동자와 여성의 삶에 눈뜬 윤순녀 대표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가톨릭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중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와 맞물려 평범한 20대 초반의 윤순녀 평화의샘 대표이사는 JOC(가톨릭노동청년회, 지오세, Jeunesse Ouvriere Chretienne)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을 뜬다. 가톨릭 신앙운동으로서 노동자들의 삶을 연결하던 활동을 시작한 뒤, 독재 정권 안에서 노동운동으로 변화한 활동을 실천했다.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정권으로부터 불온단체라는 탄압을 받았는데, 1980년대에는 이러한 노동사목(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가톨릭 정신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활동) 과정에서 수배되어 구류를 살기도 했다. 윤대표는 노동조합에 대한 블랙리스트와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1984년 노동사목협의회를 만들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이 태동하면서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전국의 노동자가 세상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낀 윤대표는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에 힘을 보태면서 교회가 이런 우산 역할을 해야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이토록 치열했던 20년 이상의 노동운동 과정에서 건강에 무리가 온 윤대표는 치병 시기, 여성신학을 만나게 된다.

 

 

여성신학을 만나다 :

감격하고 신이 나가지고 여성의 바다에서 내가 헤엄을 쳤다고 생각했어.”

 

“예수님이 5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4복음에 다 나와요. 그런데 여성이 없는 거예요. 어떤 성경에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남자만도 5천 명이었다고 하잖아요. 나는 여잔데, 왜 우리 여성이 없나? 내가 여성인데 아무것도 여성에 대해 한 자도 없는 걸 도대체 이걸 누가 기록했나? 어머 세상에! 여자가 기록한 게 아니잖아, 기록한 사람의 펜 끝에 의해서 역사는 이루어지는 거예요.”

 

혼자 이런 고민을 하던 윤대표는 1989년 미국메리놀외방선교회를 통해 여성심포지움에 참석해서 여성의 눈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88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한 많은 외국인 남성들의 한국 여성 대상 성매매 즉 ‘기생관광’에 대한 교회여성연합의 추방운동을 보면서 여성인권 관련 구체적 활동에 대한 각성을 하기도 했다.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재판에도 연대 하면서 법정에 가서 함께 목소리를 내어 더 많은 이들이 알 수 있게 알리고 항의했던 일 역시,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해 성폭력까지 저지르고, 이를 은폐했던 국가적 부조리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1990년대 초반 성폭행 의부 등 살해사건들의 진상이 드러나고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성폭력 사건과 피해생존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러한 폭력 끝에 고난과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의 사회적 투쟁을 실천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많은 여성단체의 존재를 지지하고 여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한 분 한 분 존재를 드러내면서 정신대문제 대책 활동이 힘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여성운동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 때부터 윤대표는 여성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윤대표는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 구성될 때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할머니들의 증언을 위한 정대협 활동을 했고 1993년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이하 천여공)를 구성해 연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윤대표는 어린 시절 성학대를 만성적으로 경험한 여성들의 삶이 사회적 인정과 치유의 과정 없이 묵인과 침묵 속에서 어떻게 고통을 증가시키는지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로 인한 고통이 이렇게 심화되는 걸 그때 내가 너무 느꼈어요. 결국은 피해 때문에 피해가 이렇게 오래가면 이렇게 되는구나. 할머니가 10대 때 당한 이 아픔이 무덤까지도 얘기를 못하고 살다가 가니까. 그리고 가방 속에는 항상 약이 한 보따리씩 들어있었어요.”

 

 

여성의 눈으로 세상과 교회를 보기,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정대협 활동은 윤대표가 가톨릭 내에서 여성운동을 확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천여공과 함께 19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에 참가한 윤대표는 여성폭력에 대한 전 세계적 운동과 흐름에 충격을 받았고, 한국에 돌아와 가톨릭 내에서 “여성의 눈으로 교회를 보자”라는 주제의 세계여성대회 보고대회를 주최해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를 태동시켰다. 이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공간과 인력을 확보해 천주교성폭력상담소를 구성한다.

 

“함세웅 신부님이 상도동 계실 땐데 ‘신부님 우리가 가톨릭에서도 이런 성폭력 상담소를 시작하고 싶고, 우선 사람들을 모아서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해야 되는데 교육실이 없다’고 했어요. 삼각지 성당의 (故)박은종 신부님을 소개해주셔서 갔더니 그날로 그 순간에 ‘그냥 하시라고’ 하신 거예요. 교육장소 찾으러 갔다가 사무실까지도 허락을 해주신 거예요. ‘하느님의 집을 하느님 사업하게 쓴다는데 주중에 하시는 거는 얼마든지 쓰시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천여공 이름으로 공문을 보냈어요. 우리가 성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소를 시작하려고 그러는데 내가 너무 모르니까, 그때 소개받은 사람이 (故)김미숙씨(천주교성폭력상담소 2대 소장)예요. ‘지금 시작은 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교통비 조금만 드릴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김미숙 선생님이 고맙게 ‘그렇게 하자’고. 그래서 삼각지 성당에서 상담원 교육을 하고 1998년 10월에 개소 미사를 했어요.”

 

신앙운동을 비롯해 노동운동, 여성운동을 통과해 오면서, 윤대표는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보아왔고 몸으로 부딪혀 싸워왔다. 그러한 가운데 세상을 보는 눈이 변화했고 모든 분야에서 소외되었던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의 눈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달리 보게 된다. 기생관광, 정신대문제,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성착취, 성폭력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윤대표는 필연적으로 반성폭력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톨릭 내에서 성폭력을 다루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윤대표는 작고 소중한 인연과 도움을 모으고 귀한 사람들을 엮어서 천주교성폭력상담소를 시작했다.

 

 

용기 있게 가부장적 통념에 맞서기

 

천주교성폭력상담소라고 처음 이름을 붙였을 때, 윤대표는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폭력상담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가톨릭 내 일부에서는 성폭력상담소라는 이름이 꽤나 무거웠는지 각자의 가부장적 통념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신부님이 ‘아니 근데 왜 천주교를 거기다 붙여요. 마치 천주교가 성폭력을 많이 한다고 사람들이 인식할 거 아니에요.’ 이런 얘기를 해서 ‘이토록 가부장이구나.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밀고 나갔지. 수녀님들도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났는데도 세상에 성폭력 문제가 있다는 것까지는 거의 인식을 못했었어요. 그래서 여성의 문제와 성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같이 동시에 깨뜨려줘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시작하기도 했죠. 교회 안에도 성폭력이 분명히 존재할 텐데 하면서. 성폭력 신고율이 높은 나라가 맨날 성폭력만 하는 게 아니예요. 신고율 자체가 의식이고 문화잖아요. 바로 우리가 미투 운동을 통해서 사회 문화를 바꾸는 거잖아요. 난 조금도 겁이 안 났어요.”

 

윤대표는 교회 내 성폭력 문제가 있을 때에도 평화의샘이 과감하게 같이 해야된다고 생각했다. 숨어있는 성폭력 사건을 발굴하고 피해생존자에게 연대하고 가해자를 드러내는 등 교회 내 성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기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천주교성폭력상담소가 교회 내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한계들로 인해 펼치지 못하는 꿈이기도 하다. 대신 윤대표가 한결같이 힘주어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반성폭력 운동이 척박하고, 법과 제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평화의샘은 교회를 비롯해서 정부 조직이나 공무 사회가 ‘성폭력 현안과 현장’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만들고자 해왔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법과 정책, 성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을 획득하는 것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천주교성폭력상담소는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구조 안에서 차별이나 편견, 폭력과 혐오에 맞서는 기관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지원시설 평화의샘 홈커밍데이 영상 중>

 

성매매 피해생존자 쉼터의 시작, 청소년지원시설 평화의샘

 

천주교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만나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 가운데에는 가해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쉬고 자고 먹고 생활할 수 있는 안전기지가 필요한 이들이 있었다. 상담만으로는 치유 및 일상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윤대표는 가지고 있던 전셋돈을 빼서 상도동에 있는 그리스도성혈흠숭회 수녀원으로 천주교성폭력상담소를 이전했다. 이때부터 쉼터가 필요한 피해생존자들과 윤대표는 상담소가 있는 수녀원 공간에서 함께 상주하며 살았다.

 

“방이 한 열두 개가 있는데 큰 집이었어요. 상담소를 나라에서 돈 준 데가 없었잖아요. 서울교구 가정사목위원회에서 지원을 받기도 하면서 이제 빨리 시작을 쉼터를 해야되겠다. 그때는 성폭력상담소의 쉼터였죠.”

 

그렇게 1999년부터 여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을 위한 쉼터 평화의샘을 아무런 국가적 지원 없이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공간만 가지고는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잘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먹고 입을 것,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자원, 심리정서적 지원을 할 활동가들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2000년부터 모자보건법에 근거한 선도보호시설이라는 형태로 운영하다가,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생기면서 성매매를 경험한 청소년을 위한 시설로 전환하게 되었다.

 

“보니까 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이 한 나무에 세 뿌리더라고요. 이게 경계선이 모호해요. 그때는 원조교제였어요. 밤이면 내가 그 친구들하고 지내고 24시간 살면서 했어요. 그래서 성매매라는 것에 대해 나는 그때부터 경계선이 무너졌었어요. 성폭력이 여기까지고 성매매가 여기까지고 그게 아니더라고요. 성매매방지법이 생기고 시설종류나 근거법은 달라졌지만 성매매를 겪은 청소년들과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산 거죠.”

 

윤대표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쉼터를 생각하고 시작했으나 실제로 생존자들을 만나고 함께 살다 보니 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의 맥락 안에 있는 청소년들이 있을 곳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성매매를 경험한 장애/비장애 청소년과의 생활

 

2001년 여성부가 생기면서 그나마 활동비가 생겼지만, 1998년부터 천주교성폭력상담소나 쉼터 평화의샘에는 제대로 된 급여가 없을 때여서 활동가들에게 실무자라고 이름 붙일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 윤대표는 밤에 생존자들과 2층에서 같이 살았고 아침에는 상담 선생님들과 아래층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사이 2층에서 생활하던 청소년은 낮에 할 일이 없어서 혼자 놀다가 잠깐 나갔다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밖에서 성착취에 노출되곤 했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바깥에 나가서 이제 성매매를 하는 거지. 나중에 며칠 지나고 난 다음에 내가 여기서 공부도 좀 하고, 열심히 뭘 말할 때는 네네 하고 나가서 또 그렇게 하고. 돈이 필요하면 나가서 그렇게 하는 친구를 볼 때, 이 성매매·성폭력 구조는 도대체가 장애/비장애 그런 걸 따지는 게 하나도 아니구나 했어요.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는 다른 시설보다는 장애인들이 많이 온 것 같아요.”

 

쉼터 평화의샘은 정신적/지적 장애가 있는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왔다. 장애가 있는 청소년의 성착취 피해 문제를 지원하기 어려워한 외부 기관들이 평화의샘으로 연계하곤 했고 이 밖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장애가 있는 청소년들이 평화의샘에 종종 입소했고 한 번 입소하면 오래 머물고 생활했다. 지금은 다른 시설들도 장애를 가진 청소년의 비율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평화의샘은 그 비율이 높은 편이다. 윤대표는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이 어우러져 살 수 있고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공간과 활동을 여전히 꿈꾼다.

 

“일 년에 한 번씩 홈커밍데이에 오는 사람들이 오십이 됐든 육십이 됐든 지나간 세월에 있었던 얘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나는 이 좁은 집에서 그냥 와글바글, 바글바글 살아가는 이런 모습들이 너무 감사해요.”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 냄새 나는 집,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귀하다는 윤대표가 삶의 철학으로 삼는 말은 ‘주라, 도와라, 일하라, 이것이 내 기쁨의 원천이다.’라고 한다. ‘자신이 먼저 하고/ 남들도 하게 하고/ 함께 하는’ 조직 활동 원칙을 가지고 있는 윤대표는 평화의샘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활동가뿐 아니라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피해생존자들이 사회에서 지지받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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