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글쓰기] 식탁 위의 차별

 

식탁 위의 차별

 

여름

 

가족들과 함께하는 외식 자리였다. 동생이 뒤쪽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대뜸 속삭였다. “저 사람 말투 봐. 게이인가 봐.” 비단 그날만의 일은 아니었다. “충청도 사람들은 속을 알 수가 없어”, “저 흑인 피부 진짜 까맣다.” 상황은 달랐지만, 누군가를 하나의 속성으로 묶어 평가하는 방식은 비슷했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초점은 발언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옮겨 갔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늘 예민한 사람, 유별난 사람, 이상한 데 물든 사람이 되고는 했다.

성폭력 상담소에서 근무하는 활동가로서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는지, 피해자의 말이 어떻게 의심받고 지워지는지를 매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상담소 밖 일상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말들이 농담이나 편견 섞인 말의 형태로 쉽게 오가고, 악의가 없다는 이유로 문제 삼는 사람이 오히려 유별난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차별은 의도적인 적대감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말과 태도 속에서도 차별은 재생산된다.

나 역시 처음부터 지금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활동가로서 상담소에서 일하기 전의 나는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내 안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편견을 발견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편견의 유무를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했을 때 멈추고 수정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당사자의 언어와 구체적인 경험을 접하며, 누군가를 낯선 대상으로 바라보는 감각을 점검하는 일은 계속 필요하다.

문제는 가족들이 불평등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이 선택적으로 발휘된다는 데 있다. 임금은 오르지 않고, 집값은 높아지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사회 구조의 문제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감각은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을 때는 쉽게 작동하지만, 타인이 소수자나 불리한 위치에 있을 때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사회 구조의 문제로 말하면서도, 타인이 겪는 차별은 개인의 문제나 예민함으로 축소한다.

공정이나 평등을 이야기하면 “빨갱이”라는 말이 돌아올 때도 있다. 그 말이 나오면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기 어렵다. 차별의 문제를 이념의 문제로 바꾸어 버리면, 무엇이 문제인지, 왜 잘못되었는지를 더 이상 따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별을 지적하는 말은 쉽게 가로막히고, 문제의식은 다시 개인의 예민함으로 밀려난다.

차별은 노골적인 혐오 표현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식사 자리에서 가볍게 던지는 말, 특정 지역이나 인종, 성적 지향을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하는 말, 그리고 그 말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으로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도 차별은 유지된다. ‘농담 삼아 한 말’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언어로 종종 쓰이지만, 당사자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수 있다. 말한 사람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그 말이 가지는 영향력을 지우지는 않는다.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이런 대화를 반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상의 언어를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차별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익숙한 농담과 편견 섞인 말, 그리고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반복된다.

누군가를 하나의 속성으로 단정하는 말을 멈추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낯선 존재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일상의 차별 구조를 조금씩 바꾼다. 차별은 누군가의 침묵 위에서 작동하기에,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을 예민하다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차별에 맞서는 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가까운 자리에서 오가는 말을 세심하게 다시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