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선함을 쫓다가 마주한 것들
마녹
몇 년 전부터 루꼴라나 로메인 등 어르신들에게는 낯설 씨앗을 사드리고 있다. 매년 봄 작은 베란다에서 기를 쓰며 파종해봐도, 마트에서 비싼 샐러드 채소를 사봐도 너른 땅에서 햇살과 바람을 머금으며 자란 야채의 신선함과 맛을 따라잡을 수 없다.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신선한 채소들로 나의 식탁이 풍성해진다. 야채나 과일을 좋아하는 채식지향인으로 신선함을 유지하여 보관하며, 맛있게 요리해 먹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SNS 등 여기저기서 알게 된 정보로 신선한 보관기한을 늘리다보니 각종 기능성 플라스틱이나 스텐 용기가 본가에서 우리집으로, 다시 오빠네로 옮겨 다닌다. 내 나름으로는 플라스틱이나 비닐봉투를 덜 쓰겠다고 생각하지만 냉장고 재료가 소진되고 난 후 주방에 쌓인 용기들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죽고나서도 내가 사용한 플라스틱은 썩지도 죽지도 않고 남아있을 것이란 것이 더러운 속옷을 남겨놓는 것처럼 부끄러워진다.
얼마전 “고래와 나(2023, SBS방영)”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당시 ‘보리고래’라는 희귀종이 부안 인근 한 섬의 해변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국내에서는 실제 대형고래를 부검하여 연구하는 일이 없기에 수많은 국내 고래 연구진들이 부검에 참여했다. 나이가 어린 그 보리고래의 사망원인이 무엇일지 부검을 하던 연구진들은 곧 허탈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보리고래가 죽은 원인이 장에 낀 아이스커피용 플라스틱뚜껑때문이었던 것이다. 고래는 바닷물을 한꺼번에 들이키고 먹이만 거른 뒤 나머지는 뱉어내는데, 플라스틱 뚜껑은 그 과정에서 장에 끼어 나오지 못 한 것이었다. 그 플라스틱은 어디에서 보리고래의 뱃속까지 흘러간 것일까? 우리가 집에서, 사무실에서 분리수거한 그 플라스틱은 왜 재활용이 되지 않고, 바다로, 해양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일까?
플라스틱 종류는 수십가지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PET병, 배달용기(PP), 샴푸나 세제통(HDPE), 비닐류(LDPE), 요구르병(PS) 등으로 분리수거 되고 있다. 이 플라스틱도 음식물찌꺼기나 라벨, 다른 재질이 제거된 상태일 때 재활용이 가능하기에 분리‧선별하는 과정에서 재활용률은 급격히 떨어지며, 재질별로 정밀하게 선별하기 위해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고 있다. 그렇게 선별된 플라스틱은 압축하여 재활용공장으로 옮겨지고, 잘게 파쇄하여 세척하고, 건조한 뒤 녹여서 다시 원료가 된다.
정부는 재활용률을 40~50%로 발표하고 있으나 2019년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사무소가 플라스틱 제품이나 섬유로 재탄생하는 실질적 물질 재활용률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의 실질 재활용률은 22.7%남짓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분리수거를 해도 셀 수도 없이 많은 플라스틱이 재활용은커녕 썩지도 않은 채 땅 속에 남아있거나, 바다로 유입되어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세계자연기금(WWF) 보고에 따르면 매년 1,100만톤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유입되고 있으며, 2040년까지 플라스틱 생산량은 2배가, 바다로 유입되는 플라스틱은 3배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린피스의 보고서에 의하더라도 더 이상 분리수거 및 배출만으로는 넘쳐나는 플라스틱의 수량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신선한 채소를 먹겠다고 사용하는 저 플라스틱이, 가볍게 옮기기 좋다고 사용하던 위생백이 우리가 살아갈 땅을, 살아서 움직이는 동물을, 아름답다고 환호성을 지르던 바다를 위협하는 도구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우리가 아무리 꼼꼼하게 분리수거를 해도 기업의 플라스틱 생산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배달이나 테이크아웃 한 번에 딸려오는 플라스틱을 개인의 행동만으로 규율할 수도 없다는 것도 작금의 현실이다. 소소한 한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도록 덜 만들고, 재사용 용기를 상용화하라고 요구하며, 내가 먼저 나만의 선순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텀블러를 사용한다, 손수건을 사용한다라는 것으로 환경을 위해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부끄럽고 오만한 생각이었다고도 차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했음을 고백한다. 한정된 자원에 경계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 아무런 감각도 없이 그 자원을 누리는 것, 그것도 권력이다. ‘고래와 나’가 그 무게를 일깨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