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자유글쓰기] 머리카락과 뒹굴며

 

by. 땡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방은 금방 청소를 해서 깨끗하다. 글을 시작하기 전 한껏 정리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좀 줄기는 했지만, 어릴 때부터 숱이 많아 내가 머문자리는 머리카락들로 넘쳐났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지금까지도 꼭 흔적을 남기는 걸 보니, 나는 털이 나는 짐승이 맞긴 맞나 보다. 평소 이 터럭들에 딱히 관심도 없는 데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방치하며 일주일 정도 함께 구르며 생활한다. 그러다 나의 위생과 건강을 위해, 여타 먼지와 쓰레기에 뒤섞어 이 녀석들을 보내준다. 그래, 솔직히 어떤 날은 내 하우스메이트가 못 참고 먼저 나서서 정리하기도 한다.

 

매일 저녁 바깥에서 고군분투한 하루를 보낸 후, 고개가 한창 꺾인 채 집으로 돌아와 널브러진다. 역시나 나처럼 여기저기에 뒹구는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 보고 있자니, 밖에서의 걱정과 불안을 끌고와, 스스로를 볶아 먹고 땅을 파는 나 자신의 쓸데없는 고민과 잡념의 산물들이 아닌가 싶다. 이것들이 생각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머리에서 솟아나오다보니, 실은 내 생각들이 실의 이미지로 현현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이 생각 또한 어느 모근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생각이 많아서일까. 어릴 때부터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표현하는 만큼, 나고 빠지는 머리카락들의 존재감 때문에 잔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물론 주요 잔소리꾼들은 함께 살았던 할머니와 엄마였다. “뭔 놈의 숱이 이리 많아 빠지기도 잘 빠지냐! 얼른 좀 치워라.”, “뭔, 여자애가 이리 털이 많아. 진화가 덜 됐나.” 가끔은 짜증 섞이며, 가끔은 농담조로, 그냥 이 녀석들이 흘러넘쳤을 뿐인데 내 잘못인 마냥 잔소리를 들어왔다. 그럴 때면 “그러는 할머니는! 엄마는!” 싶었다. 그런데 진짜, 그렇다. 할머니는? 엄마는? 그녀들의 머리카락은 어땠지?

 

우선 내가 태어나고부터 12년을 함께 살고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는 연세가 있는 나이임에도 숱이 무척 많았다. 또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때마다 독한 약을 입혀 새까만 색을 입혔다. 그녀는 늘 머리를 빗을 때 빠지는 빳빳한 터럭들을 한데 모아 뭉쳐놓았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이 벌레나 무슨 이상한 생명체인 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지나온 시간이나, 그에 묻은 생각들 또한 나에게는 할머니가 만든 그 뭉치들과 같았다. 이상해서 내가 오해하거나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또다시 보면 무슨 동물이나 인형 털 같기도 해, 다가가 만지고 싶었던 동그란 털 뭉치. 할머니도 나처럼 이 머리카락에 요상한 감정 혹은 미련이 있었는지 어쨌든 그 뭉치들을 곧잘 버리진 않으셨다!

 

 

다음으로 예나 지금이나 늘 깔끔한 엄마, 그녀 또한 숱이 많다. 그녀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단정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때문에 엄마의 생각들이 한올이라도 흩어지는 꼴을 볼 수 없었는지, 늘 빗자루와 테이프를 들고 방바닥을 예의 주시하며 보초를 섰다. 이런 엄마의 결벽으로 인해 어릴 때는 엄마의 머리카락만큼 숨은 생각들을 도무지 엿보거나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자라서 기댈 수 있는 든든함이 생기고 나서야, 프리하게 풀어진 그녀가 흘리는 터럭과 마음들을 이제야 살필 수 있다. 돌아보면 우리집 여자들은 넘쳐나는 머리카락과, 그와 닮은 잡생각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나름대로 갈무리하며 지내왔지 싶다.

 

어디 우리집뿐만이랴. 특히나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빗고, 묶고, 지지고, 볶고 색을 입혀왔다. 나는 이것이 단순 예뻐 보이기 위한 꾸밈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 본다. 살면서 생기는 복잡한 생각과 마음들을 어떻게든 덮어 나름으로 전환하려 했으리라. 이런 소소할 수 있는 행위를 통해, 변화를 꿈꾸었을 순수고 어쩌면 강한 의지를 상상하고 있으니, 기운을 내어 방구석에서 늘어져 있던 몸뚱이를 일으키게 된다. 나도 며칠간 이 머리카락들을 쌓아 방치해 쓰레기와 함께 버리고만 말 것이 아니라, 할머니나 엄마 그리고 뭇 여성들이 그렇듯이 매일 잘 가다듬어 보내고 쓸려가는 머리카락에 담긴 나의 생각들 또한 잘 흘려보내야지 싶다.

 

깨끗하게 치워진 방바닥에 그새 또 머리카락들이 떨어져 있다. 그냥 오늘은 흩어진 이 검은 실들을 모아, 그 타래 안에서 무언가 나온다면 좋겠다. 그리고 또 보내야지. 머리카락은 또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