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내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일까?

 

2021년 10월21일

목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친척어른의 권유로 해운회사 사장실에서 비서일을 하였다. 이후 회사의 합병으로 대기업의 영업부로 발령이 났다. 1985년에는 대기업에서 대졸여성을 채용하기 시작하던 때라 회사에는 치열한 입사시험으로 경쟁하여 입사한 몇몇의 대졸여사원들이 있었다. 출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장이 고졸 여성 사원에게 욕을 하자 부하직원들은 부장은 원래 욕쟁이라며 낄낄대고 웃는 상황이 매우 불편하였고, 여성 직원 책상위에 서류뭉치를 패대기치는 것을 목격하며 뭔가 이상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2회의 영어토플시험점수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연말 보너스의 퍼센트를 결정하는 구조였다. 연300%의 보너스는 시험성적에 따라 점수가 낮은 사람들의 보너스 비율이 점수가 높은 사람들에게 가는 구조로 나는 항상 300%에 못 미치는 보너스를 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4학년때 사업을 접었고 직장 다니는 동안 병으로 입원을 하신 상태라 생활비를 벌기위해서는 회사를 다녀야만 했다. 대기업이라 급여는 많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영어시험을 보고나면 성적이 평균에 못 미치는 직원들을 상무는 자기방으로 불렀다. 상무에게 불려가 ‘당신이 우리 부서의 평균점수를 깍아 먹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자괴감이 들었다. 대학시절 친구들은 학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유학이라는 것을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 관심도 없었지만 따로 영어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운회사라는 특성상 외국어는 업무를 진행하는데 필요하였기에 항상 마음 졸리며 회사생활을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어느 날 사원증을 다시 만들기 위해 찍은 증명사진 속에는 매우 화가 난 낮선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을 본 순간 더 이상 회사생활을 한다면 나는 점점 불행해질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자 말릴 것 같았던 어머니는 쉽게 ‘네가 원하면 그래라’라고 하여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으로 일 년 동안의 연구원 수강과 생활비를 마련한 나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퇴사하는 날 너무 행복했고 일 년이 지난 후 다음해 디자이너회사의 취업에 성공을 했다.

패션회사의 근무시간은 오전8시반부터 오후7시까지지만 정해진 퇴근시간이 없는 3D업종이었다. 어버이날이나 공휴일에 더 바쁘며, 패션쇼를 앞두고는 한 달 전부터 밤10시 퇴근이 당연시되고 행사 전날에는 밤을 새는 것이 다반사였다. 공휴일도 ~날이 아닌 ~절만 쉴 수 있었다. 급여는 내가 다녔던 대기업의 1/2도 안 되었고 보너스도 없었지만 나는 전공을 살릴 수 있다는 기쁨과 늦은 퇴근시간에도 직장동료들과 한 잔의 맥주를 마시면서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상담소는 나의 세 번째 직장이며 가장 오랜 기간 일을 한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다.

상담소에 입사한다고 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급여가 너무 적다고 걱정을 했다. 상담소 입사를 앞두고 길에서 만난 아는 의류회사직원이 자기네 회사에 사람을 구한다며 상담소 급여의 2배 이상을 말했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고 차별이 있는 곳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주말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쉴 수 있는 조건이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내가 거부할 수도 도망갈 수 없이 나를 옥죄고 있는 문제다.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의 치매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치매가 있는 어머니에 대한 보살핌은 서서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보면 화가 나서 큰소리가 나고, 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명을 해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불통의 관계, 매일 반복되는 생리현상의 흔적들, 기본적인 에티켓 조차 안 되는 기약 없는 행동들.

 

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일까? 앞으로 남은 삶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할까? 나의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