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장례식장에는 ‘누군가에게’를 틀어주세요

내 장례식장에는 ‘누군가에게’를 틀어주세요

_마녹

 

얼마전 뮤지션 이랑님이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며 언니가 좋아했던 것들로 장례식장을 꾸몄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녀의 언니는 평소 살사댄스를 즐겨추는 특수교사였기에 음악을 틀고 춤을 출 수 있게 장례식장을 꾸몄고, 언니의 친구들 또한 언니를 더 잘 추억하며 인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도 가끔 나의 장례식을 꿈꾸곤 한다. 내 죽음에 내 장례가 내 바람처럼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장례식장에 대한 바람이 선명해졌다.

 

내가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A로부터 시작되었다. 중학교 3학년 바람이 차가워지던 늦은 가을에 A가 죽었다. 주말이 지나고 희희낙락거리며 학교에 도착했는데 반 아이들이 수군수군대고 있었다. A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던 친구들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죽은 모습을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한 말을 전했다. 놀라고 당황스러운데 표현할 새도 없이 일과가 시작됐다. 선생님들은 A가 존재하지 않던 사람인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막으려는 듯 교실마다 다니며 조용히 시켰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 채 학교가 끝났다. 학교 교문에서 3분도 안 되는 곳에 있던 친구의 집은 굳게 닫혀 있었다.

 

A가 왜 죽은 것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낮에 친구들이 전한 A의 죽은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놀라서 깨기를 반복했고, 온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장례식도 가보지 못 한 채 며칠이 흘렀다. 어느새 학교에서 A의 존재는 지워지고 있었고, 내게 남은 것은 밤마다 꾸는 악몽과 A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들이었다. 한 학년에 세 개의 반만 있는 시골마을에서 여중생의 자살은 눈덩이같은 말들로 뒤덮였다. A와 친하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A가 죽은 이유를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했다. A와 친하게 지낸 우리도 모르는 이야기를 저 아이들은 왜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건지 진저리가 났다. A와 인사도 못 하고 갑작스레 헤어져 가슴이 쥐어짜듯 아픈데 어디에도 그걸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어느 날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A와 친하던 몇몇이 조촐한 인사의 자리를 만들었다. 어른들의 도움없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운동장 한 켠에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를 놓고 묵념을 하는 것 뿐이었다.

 

죽음이 내 안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04년이었다. 어느 날 선교사이던 김선일님이 이라크에서 피랍되었다. 김선일님은 주황색 수의를 입고 무장한 사람들에게 총으로 위협을 당하는 모습으로 뉴스에 등장했다. 나는 생면부지인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고 두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그는 살해됐다. 그 소식을 전하던 앵커가 ‘이제는 주황색만 봐도 무섭습니다’라고 하던 멘트처럼 나 또한 주황색도, 그 소식을 전하는 뉴스의 시그널도, 그의 이름이 떠있는 검색엔진도 무서웠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마다 온 방에 불을 켜놓고 클래식 음악을 틀었지만 잠이 들다가도 한 곡이 끝나면 놀라기를 반복했다. 그 생활이 6개월이 넘어가니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을 것 같아 본가로의 복귀를 고민하기도 했다. 어느날 정신과 의사가 쓴 칼럼을 보고 내 증상이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임을 알게 되었다. 내 심리상태를 알게 되었지만 전문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진 않아 잠드는 방법만 고민하며 클래식 음악만 들었더니 어느새 클래식 애호가가 되어 있었다.

 

다시 십여년이 흐른 어느 날 중학교 친구 B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 말기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위해 호스피스로 들어갔다고 하니 죽음이 등뒤로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A를 보냈을 때처럼 또 다시 두려움으로, 악몽으로 매일 밤을 지내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지만 내 마음에 후회가 남지 않기 위해 B의 병실로 달려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B의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게 몸을 돌려주고, 입술에 물수건을 대 주는 것뿐이었다. 밭은 숨만 남은 친구 곁에서 그 시골마을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때는 소중한 줄 몰랐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의 소소한 일상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처음으로 부끄럼없이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얼굴에 검은 빛이 돌던 친구는 호스피스에 들어가고 꼭 한 달이 되던 날 맑은 얼굴이 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파하던 B가 더 이상 안 아프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죽음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안식과 평안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A가 죽었을 때 어른들이 나와 친구들이 A와 제대로 이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지금보다 조금 더 담담하게 죽음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두려움을 없애려고 죽음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덕분에 내 죽음에 대해서는 설계를 다 마쳤으니… 내년엔 다시한번 유언장을 남겨야지.. 그런데 그 전에 내가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하나만 기억해주길 부탁하고 싶다. “내 장례식장에는 김사월의 ‘누군가에게’를 틀어주세요. 그거면 편안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