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엄마와의 티타임

 

엄마와의 티타임

 

 

땡글이

 

올해 7월 결혼을 했다. 내 기준에서 ‘결혼’이란 말은 아직도 낯설고 나의 상태를 정확히 표현한 단어 같지 않다. 그냥 바라던 대로 나의 오랜 연인을 하우스메이트 삼아 독립한 느낌이 강하다. 최근 내가 겪은 큰 사건을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이 아니라) 30여년만의 ‘엄마에게서 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 손에 있다가 떠나면 고생한다고, 특히 딸들은 살림 때문에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괜찮다. 캥거루였던 나와 다르게 기나긴 자취 생활로 단련된 하우스메이트 덕분인지, 요즘 기술의 발달로 살림을 책임지게 된 삼신가전님 덕분인지, 아니면 깨끗한 감성 공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집은 원래 노동의 공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서인지 생활에 대한 적응은 잘 되었다. 그럼에도 퇴근 후 저녁, 집에 혼자 있을 때 밀려오는 쓸쓸함엔 엄마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이 있다. 앞으로 더 익숙해져야 할 고독 안에서 나는 엄마의 ‘이야기’가 그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정확히는 성인이 되어 이제 삶의 실망과 절망을 더 알아가게 됐을 때부터 엄마랑 나는 항상 식사 후 티타임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고민을 얘기할 때도 있었지만, 학교부적응, 진로고민, 취업문제, 직장 내 스트레스 등 “이제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엄마는 늘 곁에서 들어 주었다. 엄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나, 할머니에게 들은 옛날 가족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내 고민과 관련 없는 얘기들을 듣고 생각을 말하다 보면 당장의 힘든 일들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기도 했다.

난 엄마의 살뜰했던 돌봄노동 보다, 나와 상관 없는 듯 연결된 엄마의 이야기들이 벌써 그립다. 하지만 이상하게 전화를 하고 싶지는 않다. 전화를 자주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은 느끼면서 이상하게 자주 안하게 된다. 막상 해야지 마음 먹으면 부담이 되어, 최근 그런 나의 마음이 계속 괴롭고 궁금했다. 혼자 거듭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가부장에 충성하며 자라온, 자타공인 ‘현모양처’였던 엄마는 3년전 아빠와 이혼을 했다. 나랑 동생이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안정적인 가계를 꾸리길 원했던 엄마, 원래도 한량끼가 있겠다 이젠 자식도 다 컸으니 있는 돈 펑펑 쓰며 놀겠다는 아빠, 이들 사이에 자주 대립이 있어왔다. 지금이야 아빠를 이해하지만, 그 때는 엄마를 마냥 불쌍히 여기며 아빠에게 분노하는 장녀, 바로 내가 있었고, 서로 얼굴 붉히고 사느니 다같이 편하게 갈 방법을 모색하자는 동생놈이 있었다. 엄마 사전에 가정이 우선이었고, 이혼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랑 동생의 심적 안정을 이유로, 아빠에게 설득력 있는 경제적 조건을 제시하고 둘은 합의 하에 헤어졌다.

그간 아빠와 싸우는 와중에도 엄마는 나나 동생이 들을 까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목소리를 낮췄기 때문에 내가 박차고 끼어들어 대신 발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릴 적 사랑을 받은 만큼 아빠에 대한 분노가 더 컸던 것 같다. 당사자인 엄마는 혼자 삭이고 참는 사람이었다. 가정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나중에 엄마가 내게 고백한 것처럼 엄마는 스스로가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혼녀로 지내는 것이 초라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세간의 눈치도 봤었을 것이다. 물론 선택 후 엄마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반년 정도 혼란스럽고 힘들었지만 엄마는 본인의 감정이 우리 남매에게 안좋게 영향이 미칠까 우려했고, 무엇보다 이대로면 이 이혼이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당당하고 재미있게 본인과 아빠의 일을 희화화해서 가족이나 동료에게 털어 놓고 다녔다. 자신감 없어 조용했던 사람이 말이 많아졌고 익살스러워졌다. 숨기기보다 오픈하고 털어놓은 덕분에, 말을 재미있게 해서, 엄마의 곁에는 엄마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엄마가 해학으로 가장했어도 그 뒤에 참고 있는 슬픔을 알아보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는 이야기꾼이 되어갔다. 덕분에 엄마의 새 친구들이 늘어, 어느새 우리 집은 엄마 또래이거나 그 보다 나이가 많은 이혼, 사별, 비혼 등 다양한 이유로 혼자가 된 아주머니, 자매님, 이모들이 티타임을 가지러 왔다. 늘어나는 손님들만큼 믹스커피, 알커피, 원두커피, 녹차, 홍차, 보이차, 생강차, 히비스커스, 페퍼민트, 블루멜로우, 루이보스 등등 우리 주방 한켠에 차들도 늘었고, 그것은 따스하게 마음을 녹이며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주었다.

 

 

나 또한 엄마의 이혼 직후 참 갈등이 많았다. 아빠에 대한 원망이 엄마보다 더 격렬했고, 엄마가 내게 의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감정이 주체가 안될 때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속 없이 떠드는 엄마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티타임이 있었다. 서로 의견이 달라 주체 안되는 감정 때문에, 나는 내 방에 들어가 귀를 막을 때도 있었고 연인의 집으로 잠적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독불장군 같던 내게 계속 차를 권했고 기다렸다. 간식을 나누며 우리는 서로 말하고 듣는 시간을 가졌다. 아빠의 어린시절, 조부모, 우리가 아는 아줌마, 이모, 자매님, 친구들이 최근 겪는 이야기, 그들이 어떻게 현재를 이겨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내가 평소 읽는 책, 엄마랑 내가 같이 본 영화 등 여러 가지를 나누다 보면 동요되는 감정은 가라 앉고 어긋나던 대화들도 자리를 찾아갔다.

나의 결혼이 오작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3년간 엄마가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서 종속되기 보다 본인의 삶을 다시 채워가고 있었기에, 엄마는 현재 용서를 구한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것이 최근 일이다. 아무리 드라마나 해외에서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커플들을 보았어도 난 무던한 동생놈과 달리 당혹스러움이 컸다.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조금씩 그간 엄마와의 티타임으로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낯선 차들처럼, 부모란 틀을 해제하고 엄마, 아빠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와 정체성 또한 받아들이게 되는 면역이 생긴 것 같다. (이미 생애주기 상 어른이지만) 이렇게 진정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가! 뭐 그런거지.

 

 

큰일을 치르면 철이 든 다는데 올해 결혼도 하고 온전한 나의 일상을 지내며, 나의 혼돈이 적어도 내 안에서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글을 쓰면서 내가 결혼 후 엄마에게 먼저 전화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것은 몇 년간 일로 엄마나 내가 서로 성장해오며 갖게 된 변화들이 어색해서란 생각이 든다. 이 또한 금방 적응하리라 믿는다. 결혼식 날 “나의 유년의 장을 채워주어 감사하다.” 고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알라딘이 지니를 풀어주듯 ‘엄마’를 보내주는 주문이었다. 이젠 엄마가 더더욱 자유롭게 ‘본인’ 그 자체로서 살아가기를 응원한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애틋함과 달띤 오그라듦은 여기까지이지 싶다. 그냥 해학으로 무장한 이야기꾼의 청자로 계속 남고 싶다. 자~!! 나보다 더 바쁜 윤여사! 이번엔 무슨 차랑 디저트를 가져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