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놀이치료및심리상담 실시 – 여성부치료회복프로그램안내






천주교성폭력담소
치료회복 프로그램


무료 심리상담 및 집단상담 안내







상담소는 여성부 성폭력 피해자 치료회복프로그램 사업 수행시설로 성폭력피해를 입은
아동, 청소년, 성인을 대상으로 개별심리상담과 집단상담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성폭력피해
이후 심리적 치유를 원하시는 분들은 놀이치료, 미술치료, 심리상담, 집단상담 등에
참가하실수 있으며, 모든 프로그램은 여성부와 복권위원회의
후원으로 무료로 진행됩니다.






개별심리상담




전문상담자와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상담입니다. 주 1~2회, 50분의 상담이 진행되며 상담내용은 비밀
이 보장됩니다. 연령, 발달수준, 장애여부, 참여자의
욕구, 필요여부에 따라 놀이치료, 미술치료, 독서치료, 심리상담 등으로 진행됩니다.




놀이 및 미술치료


자신의
어려움과 심리적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취학 아동들이 놀이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직접적인 성폭력피해 뿐
아니라 발달장애, 행동장애, 정서적 어려움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부모 및 보호자 상
담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청소년이나
성인으로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말로 하는 상담이 어려울 경우,
미술치료 작업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


성폭력피해의
휴유증은 성적인 영역뿐 아니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대인관계, 이성교제나 결혼생활,
성격 등 삶의 전영역에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을 통해
누구와도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을 표현하고 최근의 피해나 어릴 적 성폭력피해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서 치유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여성중심, 피해자 중심의 상담으로 진행됩니다.




과정
: 전화문의 → 접수면접 → 지원프로그램 및 상담자 선정 → 심리검사 → 상담시작




개별심리상
담(아동놀이치료,
심리상담)은 한정된 예산으로 인해 일인당 15회기의 상담료가 지원되고 있습니다. 단,
피해후유증이 심각하거나 타기관의 상담을 받으실 수 없는
경우에 한하여 장기적인 상담도 가능합니다.


문의
02) 825-1272, 인터넷 상담게시판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2 : 발전과정






천주교성폭력상담소,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1. 1998년 ~ 2000년 : 태동과 걸음마




1998년 10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이하 천여공)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실 ‘평화의샘’이
개소하였으며 일년 후 쉼터가 개소하였다. 천여공 부설로 시작된 만큼 이 시기
에는 가톨릭단체, 여성운동단체의 성격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회원단체로서 회원들 간의 친목도모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상담과 교육
에 있어서도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컸다. 상담은
전화상담의 비중이 높았으며 교육은 주로 성당성교육이었다.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실


민주화운동시기를 거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실천적 신앙을 지향하며 다양한 분야
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주교 여성들은 사회문제와 교회문제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여성운동과 방향성을 함께 하던 이러한 흐름은 가
톨릭교회 내에 여성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져
1993년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가 설립되었다. 80년대에 시작하여 90년대 들
어 본격화된 반성폭력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던
1990년대 후반에는 성폭력예방과 상담활동을 천주교회 안에서도 해야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이에 따라 천여공은 2년여에 걸친 준비과정을 거쳐
97년 실질적인 개소준비모임이 갖고 98년 천여공 부설 성폭력상담실을 만들었다. 성폭
력상담실의 장기 목표는 천주교회 내에 독립된 성폭력상담소를
설립하는 것이었지만 초기의 역량으로는 성폭력상담실의 자립이 어려웠다. 따라서 성
폭력상담실 실장(현재로는 소장)은 당시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이었던
윤순녀 회장이 겸임하기로 하였고 천여공 회원들이 상담소 운영위원회에 참가하여 상
담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교회 내에서 시작한 만큼 상담소 초기 활동의 주요 영역은 교회였다. 소식지를 통
해 교회 안에서의 남녀차별문제를 제기하면서 교회여성들의
기도와 여성들의 연대와 활동으로 극복해나가자고 홍보하였으며, 2000년 천주교 주교
회의 가정사목위원회와 함께 개소 2주년 기념 심포지움
“현대사회와 성”에서 교회 내 성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
다. 상담소 내에서도 정기적으로 월례미사를 드렸고 상담원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피정이 실시되었다.


재정과 인력의 부족을 자원봉사자의 힘으로 메우다


개소 당시 상담소에는 상근자가 없었다. 재정상의 문제로 소장과 실무자가 모두 반
상근인 상태로 99년이 지났고 2000년이 되어서야 두 명의
실무자가 상근을 하게 되었다. 실무자의 부재를 매운 것은 10여명 내외의 자원봉사자
들이었다. 98년 8월 개소 전 실시되었던 제 1기
상담자원봉사자 교육을 수료한 후 자원한 분들이 요일별로 상담소에 나와 훈련을 받으
면서 상담전화를 받았고, 99년 9월 제 1기 성교육전문강사
양성교육 수료자들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99년 1년 동안 상담소는 305건의 상담을 받
았는데 상담방법으로 보면 전화상담이 94%였고 이 중
171건만이 성폭력상담이었다. 같은 해에 외부로 출강한 교육은 모두 12회였는데 주일
학교의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교육이었다. 사무 분야에서도
자원봉사자가 일손을 거들었다.


첫 번째 이전과 쉼터 개소, 기관의 터를 닦다.


1999년 6월 처음 둥지를 틀었던 삼각지 성당을 떠나 상도동 성혈흠숭 수녀회의 연
수원으로 기관을 이전하였으며 그 해 8월에 상담소
설치신고를 하고, 10월 선도일시보호시설 ‘평화의샘’ 쉼터를 개소하였다. 쉼터는 20
00년 6월 서울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소속으로
설치신 고하였다. 2001년 쉼터가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실무자가 생기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독자적인 운영이
가능해졌지만 이 시기에는 상담소 부설로 운영되었다.



2. 2001년 ~ 2004년 : 안정과 모색



2001년부터 국가에서 인건비를 지원받고 그간의 경험이 쌓이면서
성폭력상담소의 기본적인 운영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상근직원이 늘어났으며 기관 소유의 사무실로 이전하였다. 상담소
의 특화사업으로 심리상담과 놀이치료를 이용한 방문상담을
시작하면서 사업의 주요영역과 대상이 교회에서 일반으로 변화하였고 일반 성폭
력상담소와 구별되는 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힘을
비축하며 내부의 역량을 키우던 시기였다.


홀로서기


2001년 0월 정부지원 상담소로 결정되어 운영비가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소장이 상
담과 연대 사업을 담당하고 교육담당 실무자 일인, 홍보
및 사무담당 일인으로 총 3명의 실무자들이 모두 상근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사업에
따라 반상근 간사를 쓰기도 하였다. 2003년부터는 김미숙
소장님과 교육부, 상담부, 홍보부 등 5명 체계로 개편되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
에서 인력을 확충하는 것에 기관의 부담은 컸지만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002년 1월 5일에는 천여공 제 10차 정기총회에서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다. 새로
들어오는 실무진들이 천여공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긴밀한 관계에서 상담소를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자립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
졌기 때문이다. 처음 상담소가 개소되면서 세웠던 장기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전세로 살던 수녀원집터가 재개발이 되면서 2003년 7월에는 사무실도 이전하
였다. 후원주점과 특별후원사업 등을 거쳐 많은 분들의
정성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방문상담, 상담소의 방향을 잡다


2000년 12월에 지원한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놀이미술치료를 위한 방문상담
’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프로젝트는
2001년부터 시작되었고 2001년 7월에서는 서울시 늘푸른 정보센터(현 서울시 늘푸른여
성지원센터) 테마사업 성폭력부분에 ‘보호시설에 있는
성폭력피해청소녀 방문상담’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 이 사업의 성과는
개소 4주년 놀이치료 미술치료를 통한 저소득층 성폭력피해어린이
방문상담사례발표회를 통해 타기관들과 공유되었다. 방문상담 사업은 사회복지공동모
금회, 여성부, 서울시의 지원을 번갈아 받으며 계속되었고
2005년부터는 복권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다.
방치되어있는 성폭력피해아동
을 보며 느낀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이 사업이 상담소에
미친 영향을 세 분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면에서는 놀이미술치료를 포괄하는
심리상담, 방법상으로는 방문상담, 대상의 측면에서는
아동이다.


1) 심리상담
일반적으로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외부의 상담전문가나 놀이치료사에
게 사례를 의뢰하거나 연계하게 된다. 우리 상담소에서 직접
심리상담을 할 수 있었던 건 실무자 중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한 상담심리사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동놀이치료와 청소년과 성인 심리상담을
상담소 내부에서 소화하면서 수퍼비젼도 강화되었다. 기관의 주도하에 월 4~5회 수퍼
비젼이 이루어지면서 개별 상담자의 임상경험이 쌓여 가는 만큼
그 경험이 기관에도 함께 축적될 수 있었다.


2) 방문상담
저소득층 및 소외계층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방문하여 놀이치
료 및 심리상담을 하는 방문상담은 역량을 갖춘 상담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수료하고 상담을 전공하거나 상담을 하고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교육을 개발했으며 정기적인
보수교육과 수퍼비젼을 통해 전문 인력을 양성해왔다. 8년의 사업을 통해 배출된 인력
들은 방문상담원계약이 종결된 후에도 사회복지나 상담,
성폭력상담소에 일하고 있어 기관 간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방문상
담 사업을 통해 연계된 복지관이나 공부방, 쉼터 등도 사례
진행시 함께 논의가 가능한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3) 아동
아동의 경우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성폭력피해 이후 면접단계나
심리상담 단계에서도 지원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아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동발달이나 심리적 상태, 성폭력피해 후유증이 나타
나는 증후, 성폭력피해 외에 환경적 어려움에 대한 대처방법,
부모 상담 등에 대한 정보를 경험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성
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피해로 고통 받는 아동들을 지켜보면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3. 2005년 ~ 2007년 : 도약과 혼란




2005년이 들어오면서 두 가지 큰 프로젝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3년 동안 진행된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사업’과 ‘저소득층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센터’를 통해 인건비와
사업비가 확보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그간 하고 싶었던 많은 사업이 시도되었고 상담지원체계가 개선되고
교육활동이 급격히 늘어나는 등 가시적인 성과와 함께 내적인
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인력과 활동이 급격하게 확대된 만큼 조직 정비
에 투자되는 에너지가 컸고 덩치가 커진 만큼 시행착오를
바로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기관의 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실무자들의
소진이 컸다.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사업


2004년 10월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테마사업에 선정된 ‘아동성학대 대응능력 강화
사업’이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담인력
1인과 사업비가 3년 동안 지원되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담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학대피해아동의 사회적 서비스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 동작구 아동성학대 지킴이단 발대식 및 활동, 아동성학대 예방과 대처를 위한 교사교육사업, 정책 간담회, 아동성학대 예방과 대처를 위한 교사 지침서 및 실무자 지침서 제작 및 배포, 아동성 학대상담원 업무지침서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진행하면서 성폭력상담의 전문성에 대한 고민도 함께 진행되었다. 기존 상담소의 상담
과정에서 위기지원과 심리지원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반성과 함께 사례지원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하고 개별 상담원들이 한 사례를 모
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적인 역할을 가지고 상담원들이
함께 하나의 사례를 지원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상담원들의 전문성
을 높이는 동시에 소진을 방지할 수 있었다. 상담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할을 중심으로 한 체제개편이 가능하였다. 상담소에서 할 수 있는
지원과 할 수 없는 지원을 분명히 구별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지원이 가능한 기관을 확인하고 연계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부설 성교육센터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 사업으로 선정된 성교육센터는 저소득층 청소년과 아동을 주
요대상으로 하여 2005년 3월부터 2008년 3월까지
10명이 인건비를 지원받았다. 센터 10명, 아동성학대전담인력 1명, 기존에 있던 상담
원 5명까지 상담소는 16명의 실무자로 가득 찼다. 장소와
일할 책상과 컴퓨터를 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개별 사무실을 얻었다가 다시 상담소로
들어오는 등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인력 확보
측면으로 보면 단연 기회였다. 센터의 직원들은 성폭력상담원과 성교육강사로 훈련을
받았고 센터와 상담소 업무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3년의
사업기간 동안 총 1,280회의 교육을 하였으며 교육을 나간 수많은 기관과 새로운 연대
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2003년 이후 시작되었던
집단상담식 성교육을 좀 더 변화 발전시켜 성매매, 성폭력피해자, 성폭력가해자, 미혼
모, 가출 청소녀 등 특수집단성교육을 진행하였고, 대상의
성격이나 연령에 따른 교안을 작성하여 경험과 연구의 결과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러나 3년의 활동을 통해 이후 센터를 유지할 수 있는
인력과 재정을 확보하려 했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
함과 낮은 급여, 기관 확장 단계에서 생긴 업무역할의 혼란
등으로 생긴 갈등 등이 어려움 중의 하나였다.


연대활동과 지역활동에 힘을 쏟다



여성단체로서의 정체성이 컸던 첫 번째 시기(1998~2000)에
비해 전문성을 강조하며 사업을
키워가던 두 번째 시기(2001~2004)는 외부활동이 제한적이었다.
2005년에 들어서
며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실무자들이
늘어나면서 소장이 실무영역 외에 다른 영역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성폭력 예방과
대처과정에서 사회적 인식과 법, 정책의 중요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통합적 지원을 강조하며 사례관리를 시도하다보니 사례지원에서도 지역사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김미숙 소장님이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 청소년위원회 위원을 맡으면서 정책제언과 사회홍
보활동에 좀 더 힘을 기울였으며 상담소 차원에서도 기관이 위치한
동작구 내 경찰서와 간담회를 가지거나 여성폭력단체들과의 연계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의 활동을 해나갔다. 동작구 내에 지킴이단에 동의한 000개의
약국과 문구점에 스티커를 부치고 안정장소로 활용하고 이를 학교교육에서 홍보하는
식의 사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활발한 지역 활동을 통해 발견된
지역 내 학대피해사례나 성폭력사례가 상담소에 조기신고 되고 이후 지역단체나 사회
복지사, 동사무소 등과의 협력을 통해 피해아동과 가족을 여러
방향에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4. 2008년~ : 선택과 집중




인건비와 사업비가 지원되던 프로젝트 사업이 종결되었다. 사업은
축소되었으나 성과는 상담원 개개인과 상담소에
축적되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10년의 성과와 한계


1991년 1개소였던 성폭력상담소가 2008년에는 200여개소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지원서비스를 비교적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운영주체나 상담소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담소에 따라 운동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인식 개선이나
정책제언, 반성폭력 운동을 주요하게 펼치기도 하고 사회복지전달체계의 하나로 상담
서비스만 강조하기도 한다. 법률 제정과 정부의 운영비 지원을 통해
상담소들이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면서 각 상담소의 활동이 지도점검의 이름으로 통제
되는 경향도 보인다. 여기에 더불어 정부주도의 아동성폭력전담센터,
원스탑지원센터 등이 확대되면서 민간 상담소들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의 10년사를 돌아보면 가톨릭여성운동단체에 기반을 두고 시작
하였으나 ‘운동성과 종교색은 약화되고 전문성은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성폭력상담에서 운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
조되어도 모자람이 없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시각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개소 초기의 문제의식 또한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운동성의 약화는 여전히
우리의 한계로 남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상담소에
요구되는 것들을 모두 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껏 우리는 ‘개개인의 내담자를 전
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를 다른 상담소들과 공유하고 타 상담소들과의 긴밀한 연
대 속에서 운동성을 견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앞으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2007년 10월과 2008년 2월에 모든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상담소 조직체계가 정비되
었다. 성교육센터가 정리되면서 교육 사업은 대폭
축소되었지만 사례관리자, 지원상담자, 심리상담자 등 역할을 중심으로 개편된 사례관
리체계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6명의 실무자가
상담소에 남았다. 매해마다 운영비를 확보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뜻이 있으면 길
이 있는 법. 앞날을 걱정했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다.

건강한 상담자가 내담자를 돕고, 행복한 실무자가 기관의 미래를 만든다. 그래서
2008년,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행복한 실무자, 건강한
상담자 만들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1 : 대표인터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이사 41.10)




Q)
올해로 기관이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소감이 남 다르실 텐데 어떠신가요?



10년이라는
시간이 참 빨라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실감이 안나요. 시편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10년이 너무 금방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 동안 우리가 집을
세 번 옮겼는데 그 생각도 나고. 지난 10년은
정신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Q)
기관의 태동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하셨는데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과의 만남




92년에
정대협 할머니 문제가 처음 신문에 났는데 그때 나는 필리핀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였어요.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는지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정대협 사무실이었어요. 그 때 정대협도 힘들 땐데
찾아가니 너무 반가워하더라고. 천주교에서도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함세웅 신부님께 부탁해서 할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자고 했지요.
내 생각에 그걸 해 드려야할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돈도 모아서 그 해 말에 아현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할머니 20여분
이 오셨고 신부님도 여러분 오셨어요. 93년도에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가 만들어져서 정대협 사업을 함께 하게 됐죠. 그러다가 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를 가게 되었고 한 1년 동안 같이 가는
사람들과 여성대회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 그룹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얘기가 교
회 안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삼각지
성당 방 한 칸에서 시작하다.




97년도에
그 얘기가 좀 더 가시화되면서 천여공 부설로 성폭력상담실이 출범하게 되었지요. 상
담이야 방에 전화 하나 두고 하면 되는데 교육 장소가 없는
거예요. 함세웅 신부님께 의논을 하니까 삼각지 성당의 박은종 신부님을 찾아가 보라
고. 그래서 갔더니 너무 쉽게 ‘쓰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돼서 오히려 걱정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걱정을 하니깐 성당
은 누구에게나 열린 하느님이 주신 장소라고, 특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열린 곳이니까 쓰라고. 그래서 주중에만 쓰는 조건으로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 컴퓨터 하나 두고 그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교육실
빌리러 갔다가 사무실까지 된 거죠. 98년 6월에. 그리고 이제 실무를 해야 하는데 막
막하더라구요. 그래서 천주교여성공동체 이름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공문을 보냈어요. 그러니까 당시 소장이었던 최영애 씨가 직원들
한테 물어본 거지.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할 사람 있냐고. 아마
월급은 어려워도 교통비정도는 줄 거라고. 그래서 오게 된 사람이 김미숙 선생님이예
요. 김미숙 선생님이 오면서 실무자가 생기고 장소도 생겼으니
박차를 가해 가지고 교육도 시작하고. 1기 교육이 끝나는 날, 개소식을 했어요. 그래
서 시작한 거는 더 먼저였지만 우리 생일이 10월 29일이
된 거죠.





박은종 신부님에 대한 아픈 기억




박은종
신부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하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분이니 마음이 참 슬퍼요.
신부님께 참 고마운 게 당시 우리가 실무자랑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근근히 최소한의 경비로 운영하고 있을 때인데 종종 사무실에 들러서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시고서는 그냥 봉투를 놓고 가세요. 열어보면
5만원도 들어있고, 10만원도 들어있고. 그런데 성당 분위기가 참 험악한 거예요. 그래
서 왜 그런가 하고 했더니 성당 신자들이 신부님한테 불만이
좀 있었던 거예요. 신부님이 오자마자 성당 안에다 노숙자들이 잘 수 있는 쉼터도 만
들고, 성폭력상담소에 방도 빌려주고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남들이 생각할 때 성폭력상담소 그러면 더러운 단체 이런 게 좀 있었고, 게다가 노숙
자 쉼터는 낮에는 동네할머니들 와서 지내는 건물인데 밤에
노숙자들을 데려와서 자게 했거든. 그 때가 IMF 터지고 나서 얼마 안 지났을 때라 서
울역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니깐.


그러다가
99년 3월 달에 신부님 발령이 휴양으로 나온 거예요. 본당 오신지 일 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강원도 상동 공소에 계시다가
2000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어요. 우리 때문에 삼각지 성당을 떠나신 것 같아서 늘 마
음이 무겁고 아팠죠.




수녀원의
도움으로 두 번째 집으로 이사가다




박은종
신부님은 가시면서 우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후임신부님께 다 얘기해 두겠다고 그랬
었지만 오신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사무실을 비워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여기저기 부탁도 하고 매달려 보기도 하던 중에 다행히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수녀님들이 도와줘서 상도동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지요. 워낙 수녀원 수련소였는데 집도 크고 마당도 넓은 그 좋은 집을 6000만원에
빌려줬어요. 2000만원은 어떻게 융통을 하고, 나머지는
내가 전세를 빼서 이사를 왔지요. 99년 6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상도동에서 살았어요.
99년 겨울에 그 집에서 정말 너무 고생을 했어요.
그 집이 엄청 컸는데 독일식 기름보일러 난방비가 300~400만원이 든다는 거예요. 그
때 우리가 기름값이 어디 있어. 먹고 살 것도 없는데.
그냥 떨고 살아야지. 낮에는 실무자들이랑 함께 있어도 밤에는 나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정말 그 해 겨울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게 정말
하느님의 역사라는 게 그 너무너무 추운 겨울에 떨면서 지내는데, 저희 교육을 받으셨
던 박선과 신부님께서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군대
간 아들을 위한 미사를 부탁드리면서 봉투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 때 우리 생각이
났다고 그러면서 그 분을 모시고 우리 집에 오신 거예요.
가시고 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거기에 200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그 해 성탄선물이었죠
. 우리에겐.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돈이었죠. 그 돈으로
기름 넣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 쓰면서 첫 해 겨울을 났어요.




쉼터
개소, 그리고 세 번째 이사




처음에는
집도 실무자도 없어서 쉼터를 하는 건 생각도 못하다가,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까 공간도 생긴데다 서울시에서 한번 와서 보고는 쉼터를
빨리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99년 10월 25일에 쉼터 개소를 했고 2000년이 되면서
한두 명씩 사람이 오기 시작했죠. 그때는 돈도 없고
쉼터 실무자도 없었으니까 낮에는 상담소 실무자들이 함께 있고, 밤에는 나랑 있고.
참 고생 많았던 때였어요. 김미숙 선생님도 정말 고생했고. 그
때가 우리가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으니까. 쉼터 운영을 위해 실무자가 꼭 있어야 하겠
는데 돈도 조금밖에 줄 수가 없고 하다 보니 어떻게 인연이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2000년 겨울까지 두 해 겨울을 제가 혼자 지내다가 2001년에 정
부보조금이 나오면서 실무자를 쓰게 되었고 그 때부터는
조금씩 정상적인 괘도에 올라가게 된 거죠. 2003년 7월에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좀
더 안정이 된 거고. 이후 5년 동안은 무난하게 왔던
것 같아요. 김미숙 선생님이 건강 때문에 갑작스럽게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만두
게 된 게 큰 일이였지만 또 그만큼 우리 기관이 내공이 쌓여서
윗사람이 하나 없더라도 받쳐줄 수 있을 만큼 인력확보가 됐다는 게 또 감사한 일이죠
. 그렇게 꾸려나간 김미숙 선생님 덕이기도 하고.




Q)
오랫동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하셨는데 여성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으셨
나요?




87년
유월항쟁이 지나면서 그 후유증이었는지 당시에 내가 몸이 많이 아팠어요. 어느 날 성
서를 보다가 그날따라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건
뭐 수도 없이 읽었던 건데 그날따라 내 눈에 왜 여성이 그 카운트에 빠졌을까 그런 의
문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구약책을 읽으니 여성억압의
역사고,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이 성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이 있었죠. 그러다가 8
9년에 6월에 미국 메리놀 신학교에서 열리는 여성신학
심포지엄에 초대가 된 거예요. 거기서 참 충격이었던 게 신학교 학장이면 남자 신부일
줄 알았는데 숏팬츠에 젋은 여자가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사람이
학장이라는 거예요. 예전에 수녀였다가 그만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참 놀랍더라구요
.


그러던
중 심포지엄에서 요한복음 4장을 강의를 듣는데, 예수님이 정오에 물을 뜨러 나오는
여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 물을 잡숫고 싶다고 그래요. 그
여자가 ‘지체 높으신 분이 이렇게 하찮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니까
‘나는 너의 신분을 다 알고 있다. 너는 이미 6번 결혼했고
너의 남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다’ 그러시죠. 여자가 놀라서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냐고 하니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해요. ‘나는 네가
찾고 있는 메시아다.’ 여자가 그 얘기를 듣고 뛰쳐나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근데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신학자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거듭나야 합니까
’ 하고 계속 물어 보는데도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히지를
않아요. 사실 요새로 하면 낮에 물 뜨러 나오는 여자는 성매매여성이거든요. 예수님이
당신이 메시아임을 처음 밝히는 상대가 바로 그러한 여자였던
거였지. 그 강의를 듣는데 갑자기 내 안에서 뭔가가 막 끓어 오르더라구.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잘난 신학자가 아닌 여성에게 와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듯이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서 밝혀주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눈감고
있구나! 예수님이 오늘 내게 이걸 알려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너무 신났죠, 이제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내가 성서에서 느꼈
던 의문이 풀리면서 90년대부터는 한국에 들어와 여성신학과
여성학공부를 하고 미친 것처럼 일을 했죠.




Q)
처음 상담소나 쉼터를 만들던 시기에 가졌던 바람이나 저희 기관 이름이 표방하는 바
를 생각한다면 사실 종교성이 좀 더 강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현재 기관의 모습이나 하는 일을 보면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부터
구성원을 천주교신자만 뽑아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중심으로 간다면
협소해질 거라고 생각했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이름을
걸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공동체에서 필요로 하는 일, 약자와 함께 하는 일을 한다면
그게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만 교회내 성폭력은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며 늘 고민하고 있죠.




Q)
이름이 천주교성폭력상담소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희가 다른 상담기관에 비해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에서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
기관이 가톨릭사회복지회에 소속되어 있으나 교회조직 안에 들어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조직적인 개입을 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에 있기 때문에 강점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천주교에
근원을 두고는 있으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은폐하거나
두둔하는 건 없습니다. 해서도 안 되는 일이구요. 개소 2주년 되는 해에 천주교 가정
사목위원회와 함께 ‘현대사회와 성’이란 주제로 심포지엄도
개최하고 논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그 때 그 때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일
을 하다 보니 오히려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이슈화하고 다루는
일이 지연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상담소 내부의 역량이 모자라는 부분도 있고요.
우리가 다른 성폭력상담기관과 다를 수 있으려면 이론적으로도
무장이 되어야겠지만 구체적인 사례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교회 조직에 대한 이
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개입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고,
회칙이나 교서 등을 근거로 하여 대처할 수 있는 논리 또한 연구되고 토의되어야할 거
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게 앞으로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Q)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천주교성폭력상담소와 평화의 샘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지어진건가요?




처음에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부설로 시작했으니 자연스럽게 천주교성폭력상담소라고 짓게 됐죠.
메리놀외방전교회의 하유설 신부님이라고, 당시 자문위원이시던
신부님께서 요한복음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문구를 따서 ‘평화의 샘’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는데
다들 찬성해서 그 이름도 함께 쓰게 됐고요.


처음에
우리 상담소를 홍보하고 다닐 때 이름이 그게 뭐냐고. 천주교가 성폭력만 하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 신부님들도 있었어요. 천주교는 성폭력과
무관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천주교에
서 금기시되는 논의가 성문제, 독신문제 등인데 이것에 대해
얘기하면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들을 해요. 그건 아니죠. 교회의 주인은 사람, 즉 평
신도들이거든요. 이게 다 종교라는 도그마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이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나갔네요.


여하튼
지금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상담소는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쉼터는 ‘평화의 샘’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상담소와 쉼터 모두를
통칭하여 ‘평화의 샘’으로 부릅니다. 앞으로 법인이름으로 쓸 생각이기도 하구요.




Q)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시면서 힘든 것도 있고 좋았던 것도 있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길을
만드는 것은 참 힘든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건 집을 구하러 다니던 일이예요. 세
차례에 걸쳐 집을 구한다고 길거리를 헤매면서 항상 ‘하느님
우리가 어디서 이 일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곤 했어요. 젊어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못할 것 같아요.


좋았던
건, 쉼터에 오랫동안 있었던 친구가 결혼한 것이에요.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
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부모도 없고 글자도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와서 호적도 만들고 이름도 다시 만들고, 다시 태어난 거죠. 그 힘든 시기 잘
견디고 이제 가정을 가지고 살면서 때 되면 찾아오고 그런
게 너무 이쁘고 보기 좋아요. 기쁨이죠.




Q) 앞으로의
계획이나 생각하는 방향이 있으시면 얘기해주세요.




상담소와
쉼터가 함께 사단법인을 만들 예정입니다. 법인이 되면 현재 있는 집처럼 기관이 가지
고 있는 재산도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관리될 거고 공동체의 틀
안에서 상담소나 쉼터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상담소는
현재 전문성을 많이 인정받고 있는데 현재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
는 것을 물론이구요. 방문상담처럼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방식의 상담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쉼터
같은 경우에는 현재 쉼터가 청소년쉼터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밖에 있을 수 없
거든요. 청소년의 자활이란 결국 중고등학교를 잘 다니게 하고,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를 통해 사회에 건강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일 텐데 그들이
정말 홀로 설 수 있기 위해서 지금 쉼터만으로는 부족하죠,
앞으로 혼자 자립하기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자립관 같은 개념의 중간집을 만들고 싶
어요. 아이들이 삶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도우미 역할을 해 주는
그런 공간이면 좋겠어요.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10년을 돌아보면 하느님이 저희 곁에 있으
셨다고 느껴집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제껏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 일은 혼자 하는 일
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관심 가져주시는 많은 분들과
함께 해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윤순녀 대표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 회 장, 민통련 중앙위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공동대표,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 한 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셨으며 현재 평화의샘 쉼터의 시설장과 기관대표로 일하고 계십니다. >


함세웅신부님 축하글 “평화의샘 10주년을 축하하며”

“평화의 샘 10주년을 축하하며”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아픔에 대해 동정을 보내기는 쉽지만, 마음 깊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손잡아 주고 길을 열어 주는 일은 더욱 아름다운 가치를 지닙니다. ‘평화의 샘’은 지난 10년 동안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이 아픔을 아름다운 가치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우리사회에는 몇 년 사이 성폭력 범죄가 급증하여 뉴스를 통해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곤 합니다. 미약하지만 성폭력 범죄 해결에 대한 대책들이 나오기는 했습니다. 정책이 정책으로만 끝나고 정작 피해 입은 사람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한 구석에서 혼자 아파하고 있을 때, ‘평화의 샘’은 그들에게 쉴 공간과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삶과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평화의 샘’은 소중한 마음을 쌓아 10년 세월의 열정으로 이제는 전문성을 갖춘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성폭력피해자들을 도왔으며,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고, 성폭력 예방 교육과 피해자 상담 전문 인력 양성 교육을 하였으며, 또한 성폭력 문제를 사회적으로 이슈화하여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보듬어 안으며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오신 윤순녀 대표를 비롯한 ‘평화의 샘’ 모든 분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또한 ‘평화의 샘’이 앞으로도 우리사회의 소금 역할을 하기 바라며, 10년의 기억을 담은 이 자료집이 세상을 밝히는 또 하나의 희망 메시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10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윤순녀대표 감사글 “이제 앞으로 또 10년을 향해 걸어갑니다”

지난 일을 돌이키니 기쁘고 슬펐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성당의 교리방 한 칸에서 시작하여 작지만 편안한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고 실무자 두 명으로 시작했던 일이 한때는 20명 가까운 직원들이 함께 일할 정도로 규모가 늘어났습니다. 98년 시작할 때는 상담소 하나였지만 현재는 상담소와 쉼터 두 기관으로 나뉘어져 상담소 6명, 쉼터 5명의 실무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 상담소를 시작하였을 때 성폭력 신고율이 2%밖에 안 되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10%정도로 올라갔다고들 하더군요. 여성부가 신설되었고,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며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되어 이제껏 여성들의 족쇄로 작용했던 여성악법의 사슬들이 하나씩 풀려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10년의 기억들을 어떻게 남겨야할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매 해 남겨놓은 기록을 충실히 옮겨 우리가 이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표와 통계로 보여드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성폭력상담소, 그리고 쉼터 평화의 샘이 지금껏 해온 일, 하고 있는 일들은 결국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 상담원과 자원봉사자, 후원자, 샘동이들이 함께 해왔고 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상담소와 쉼터에서 일해 왔고 일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제껏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니 너무나 많아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사무실 입구에 있는 후원자 이름이 기록된 액자를 쳐다보며 초창기를 생각하니 마음과 기도로, 물질적 후원으로, 자원봉사로 도움을 주셨던 그리운 얼굴들이 보고 싶습니다. 어려운 시기 고생했던 실무자들 얼굴도 떠오릅니다.
모든 분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남기고 싶지만 지면한계 상 그럴 수 없어 아쉽습니다. 한분 한분의 이름을 떠올리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평화의 샘’을 거쳐 간 수많은 청소년들이 해마다 10월 ‘홈커밍데이’가 되면 친정에 오듯이 집으로 옵니다.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기도 하고, 결혼한 친구들은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평화의 샘’에서 함께 살 때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을 후배들에게 들려주며 있을 때 잘하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이때가 저는 가장 즐겁습니다. 상담소를 통해서 마음의 상처를 씻고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는 분들, 상담소와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면서 행복해하시는 분들을 볼 때 또한 보람을 느낍니다.

이제 앞으로 또 10년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희 모두 에게 힘을 줍니다. 우리가 바로 ‘평화의 샘’입니다.

2008년 10월
천주교성폭력상담소 & 쉼터 평화의샘 대표 윤순녀

<구인>성폭력 상담지원인력 지원사업 상담원 모집

<성폭력 상담지원인력 지원사업 상담원 모집>

천주교성폭력상담소에서는 성폭력 상담지원인력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아래와 같이 함께 할 상담원을 모집합니다.

근무기간: 2009. 6. 1. ~ 12. 31.
근무지역: 서울
모집인원: 1명
모집연령: 제한 없음
담당업무: 성폭력피해자 지원 및 사례관리, 행정업무
자격요건: 성폭력상담원교육 이수자로 사회복지사 2급이상,
사례관리유경험자 및 성폭력상담소 경력 우대
근무조건: 주5일 평일 8시간 근무
준비서류: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경력증명서 및 자격증사본 첨부)
* 1차서류심사, 2차면접
* 면접일자: 2009년 5월12일 오전(서류심사 후 면접일 이전에 개별통보)
접수방법: 이메일접수
접수기간: 2009년 5월7일~5월11일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상담원 채용공고

근무형태: 정규직
직종: 사회복지사
근무지역: 서울
모집인원: 1명
모집연령: 제한 없음
담당업무: 성폭력피해자 지원 및 사례관리, 행정업무
자격요건: 성폭력상담원교육 이수자로 사회복지사 2급이상,
사례관리유경험자 및 성폭력상담소 경력 우대
근무환경:노동법기준에 따른 연차휴가, 주5일 근무
7년차에 3개월의 안식년휴가(1개월유급,2개월무급)
청소년쉼터와 심리상담센터가 함께 있음
각종워크샵,사례수퍼비전,상담및성폭력관련교육(월평균4회)
준비서류:이력서 및 자기소개서(경력증명서 및 자격증사본 첨부)
* 1차서류심사, 2차면접
*면접일자: 2009년 2월18일 오전
*서류심사 후 면접일 이전에 개별통보
접수방법: 이메일접수
접수기간:2009년 1월30일~2월16일
근무시작: 2009년 3월2일부터

아동기심리장애와약물치료 교육안내

교육신청서(아동심리장애).hwp0byte 2008년도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상담워크샵 3
<교육명: 아동기 심리장애와 약물치료>

천주교성폭력상담소는 1998년에 설립되어 성폭력예방과 피해자지원을 하고 있는 성폭력전문상담기관으로서 전문적인 심리상담과 성폭력전문상담원 및 성교육강사 양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도 상담원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담교육 및 워크샵을 연중 실시하여 첫번째 <심리검사의 개관과 이해>, 두번째 <성학대피해 아동상담자를 위한 부모 및 보호자상담 워크샵>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세 번째 교육프로그램으로 12월에 <아동기 심리장애와 약물치료> 교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아동을 돕는데 효과적인 참고가 될 본 교육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교육명: 아동기 심리장애와 약물치료

■ 내용: 아동의 심리 및 행동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약물치료의 효과 및 유의점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상담자가 아동상담과정에서 참고할 점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 일시 : 2008년 12월 16일 (화) (오전 10:00~12:00, 2시간)

■ 강사: 김현수 (정신과 전문의, 사는 기쁨 신경정신과 원장)

■ 대상: 상담기관 및 사회복지기관 종사자, 상담전공자나 상담경력자, 사회복지사

■ 장소: 천주교성폭력상담소 1층 교육실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4번출구 하차 도보로 10분)

■ 교육비: 30,000원 (선착순 마감)
*교육비 환불기준은 학원수강료 환불규정에 준합니다.

■ 접수: 교육신청서 접수 (이메일 또는 팩스로 접수)
–>교육신청서는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www.peacewell.org) 게시판의 공지사항에서 다운받아 사용하시고 작성 후 상담소이메일 wellpe98@hanmail.net 로 보내주세요.
–>팩스: 825-1292

■ 문의: 02) 825-1272~3 (담당: 김형옥), wellpe98@hanmail.net
■ 입금하실 곳: 국민은행 029301-04-000477, 천주교성폭력상담소
–>교육신청서 제출 후 담당자와 통화 후 입금할 것

08′ 상담소의 일주일, 우리 이렇게 일해요.

월요일

 

전화상담과 인터넷상담

 

한 주의 시작이다. 출근한 나는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상담이 있는지 확인한다. 실무자들이 요일을 정해서 들어오는 인터넷상담과 전화상담을 받는데 월요일은 나다. 확인해보니 주말에 들어온 인터넷상담이 없다. 다른 기관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 상담소에서는 면접상담 등 기관으로 방문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인터넷상담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연 신규사례 100사례이상, 연 상담건수가 2000건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사례가 더 많이 들어오는 것도 걱정이지만 왜 인터넷상담이 줄어드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음 회의에서 좀 더 논의해봐야 할 것 같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오늘 할 일을 확인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의 엄마다. 늦은 밤 학원에서 귀가하다 집 앞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단다. 점점 살이 찌는 아이가 이상하다 싶었을 때는 이미 임신 6개월.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수사를 한답시고 학교에 와서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바람에 학교친구들에게도 피해사실이 모두 알려져 버렸단다.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오려는 딸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다. 이제 겨우 15살, 성폭력으로 임신한 아이를 뱃속에 두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어떨지, 남편 없이 키워온 딸의 고통을 봐야만 하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그 마음을 가늠하다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가 오히려 떨렸다. 당신이 일을 다니느라 집에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자책하며 울먹이는 어머니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잘못은 어머니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해드린다. 만날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먹먹하다.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한지 올해로 4년째, 나를 자위상대 삼아 신음소리를 내는 음란전화부터 이런저런 사소한 가정상담까지 많은 것들에 익숙해졌고,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실제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수화기 너머에서조차 너무나 생생하다.

 

성폭력상담원교육, 성교육강사양성교육

 

전화를 끊고 한숨을 돌리고 보니 오늘따라 상담소가 한적하다. 해마다 하반기에는 성폭력상담원 및 성교육강사양성 교육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 교육이 있는 날이 월요일이라 오윤정 선생님과 김태옥 선생님은 바로 교육장으로 출근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교육정원 80명을 채우고도 신청자가 몰려들어 대기자 명단까지 만들었었는데 올해는 영 교육생이 모이지를 않았다. 머리를 싸매고 커리큘럼을 짜고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신 분들을 어렵게 모시는 데도 올 해의 수강생은 20명이 겨우 넘었다. 장소임대료에 강사료까지 지급하고 나면 인건비도 남지 않는 적자라 하지말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그래도 어쩌랴. 성폭력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성폭력문제를 이해하고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주위를 돌보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한명이라도 더 많아지는 것이니 말이다. 이제껏 기관에서 배출한 교육생만 000명,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교육을 이어나갈 지 좀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심리상담

 

점심을 먹고 난 후, 김형옥 선생님은 상담에 들어갔다. 3,4시간 연이어 상담을 하고 오더니 지친 눈치다. 연이어서 상담을 하고나면 나 또한 약간 힘이 빠진다. 심리 상담을 전공했으나 처음 생존자들과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도 많았다. 눈물을 흘리며 가해자에게 한 폭력과 학대에 대해, 사회의 냉랭한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할 때면 정말 뭐라 한 마디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무기력해지곤 했다. 살아내야 할 삶이 참으로 슬프고 막막하여 울고 싶기도 했다. 그럴 때 수퍼바이져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상담자는 내 앞에 있는 한 사람과 그저 함께 있고, 함께 인내하고 귀 기울여주는 것으로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란 말씀이 얼마나 내게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내 자신이 가장 무능하다고 느꼈던 그 순간이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화요일

 

상담소회의, 기획회의, 전체회의

 

 

오늘은 금요일과 함께 회의가 몰려있는 날이다. 우선 매주 오전 상담소 식구들이 모여 사업진행상황이나 각자의 업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하는 상담소회의가 있다. 오후에는 기획회의로 상담소와 쉼터 실장과 소장, 대표님이 모여 기관운영사항들을 논의한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상담소, 쉼터 실무자 전원이 모여 업무보고를 하고 주요사항을 논의하는 전체회의가 있는 날이다. 지난주에 각자 작성했던 월별보고서를 취합하고 돌아가면서 업무보고를 한다. 이번 회의에서는 앞으로 있을 1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논의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다음 주에 샘동이들과 함께 갈 가을소풍 준비도 빠질 수 없다. 일이년 전만 해도 상담소 직원들도 매주 금요일마다 돌아가며 쉼터 당직을 섰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냥 저녁 한 끼 해먹고 하룻밤 자는 건데 뭐 어려울 거 있나 하겠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이 쉼터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아이 한 명이 칼로 자기 발을 찍어 샤워하던 중에 옷도 못 입고 머리에는 거품칠을 한 채 뛰쳐나와야 했을 때도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중학생, 고등학생 나가는 순서대로 깨워 밥 먹여 학교 보내는 것도 어려웠다. 이 일을 매일 하는 쉼터 당직자들은 참 대단하다. 여하튼 쉼터 실무자들이 보강되면서 상담소 직원들이 당직을 할 필요가 없어져 부담이 덜기도 했지만 한 집에서 아래위층에 사는데도 당직을 안 하니 얼굴 볼 일이 많이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일 년에 한 두번이라도 실무자들과 샘동이들이 함께 여행을 가곤 했는데 올 해는 그럴 기회가 없어서 가을소풍을 함께 가기로 했다. 올해 가을소풍 장소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공원. 가서 뭐하고 놀 건지도 뭘 먹을 건지, 누가 어떤 준비를 할 건지도 정했다.

오전에는 상담소회의, 오후에 기획회의와 전체회의를 하고 나니 다들 진이 빠졌나 보다. 힘들어 죽겠는데 김미순 선생님은 청소하자고 난리네. 우리 사무실이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우리 소장님은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한다 말이지. 후다닥 정리를 하고 오늘은 다들 칼퇴근!

 

 

수요일

 

직원능력향상을 위한 스터디모임

 

30분 일찍 출근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상담소 직원 전원이 모여 공부모임을 시작한 지도 3년이 되었다. 최근 몇 달동안 공부하고 있는 주제는 아동성학대이다. 작년에 호주 주정부에서 성학대 피해아동 상담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께 교육을 받았던 오윤정 선생님이 이번 주제를 이끌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함께 원서를 번역하면서 기본적인 개념을 다시 잡고, 외국의 지원사례나 체계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를 다시 현재 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례들에 적용해보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다. 아직 국내에서는 성폭력상담에 대한 연구가 오래되지 않은 터라 여유가 된다면 외국의 연구들을 정기적으로 리뷰해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 아직은 요원한 이야기다. 마음이 있으면 언젠가는 가능해지겠지.

 

성폭력예방교육활동, 성교육강사모임 긷다

 

오전에 긷다 모임이 있는 터라 김태옥 선생님이 분주하시다. 긷다 모임은 성교육강사모임의 이름인데 ‘평화의 샘에서 물을 긷다’ 에서 따온 말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성교육강사모임도 많이 성장하였다. 매해 성폭력상담원교육에 이어서 성교육강사교육을 한 후 희망자에 한해 강사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2주에 한번 빡센 세미나에 들어간다. 여성학 공부에 교안작성 공부까지 끝나려면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교육을 나가기 전에는 시연까지 해보는데 이게 실제 교육보다 더 어려우시단다. 우리가 교육을 나가는 곳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 교사 그리고 복지관, 지역공부방, 성매매쉼터, 성폭력쉼터, 가출청소녀 쉼터, 성당이나 교회 주일학교 등 수도 없이 많다. 성교육센터가 있던 3년 동안 충실히 대상별로 교안연구를 하고 교재도 많이 만들었다. 작년(2007년)에 했던 교육만 493회였다. 그런데 센터가 없어지고 나니 교육이 들어와도 나갈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위기지원

 

김윤정 선생님은 외근이다. 며칠 전 중학교 상담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의 일기장에서 친부와 친오빠에게 학대받고 있다는 것을 보셨단다. 긴급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경찰에 미리 연락을 해둔 후 오늘 아이를 만나러 갔다. 엄마는 없고 할머니만 있다는데 선생님 말로는 아이를 비난하고 있단다. 학교로 출발하기 전 모여서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할 건지 간단히 논의한 후 김윤정 선생님은 상담소를 나섰다. 이런 상황이면 우리 모두 떨리고 두렵다. 할 때마다 어렵고 막막한 느낌이 들곤 한다. 혼자서 그 상황을 맞이할 상담원은 얼마나 마음이 무거울런지.

이런 날은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술이나 한 잔 하면 좋을 텐데 김미순 선생님이 동작구 지역사회복지협의체 회의가 있어서 나가야 한단다. 이런 저런 일로 몇 명 되지도 않은 직원들이 다함께 모이는 것도 어렵다.

 

목요일

 

방문상담, 그리고 성학대 피해아동을 위한 놀이미술치료

 

우리 기관에는 ‘방문상담’이라는 특화된 프로그램이 있다. 상담소를 시작한 후 성폭력피해를 입었을 때 부모가 아이를 상담소에 데리고 오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는 것이 힘에 겨운 부모가 시간을 내기 어렵거나 부모가 가해자일 경우, 또는 부모가 없는 경우에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방문상담이다. 상담전공자들을 교육시킨 후 가정이나 복지관, 시설 등으로 찾아가서 상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의 회복과정은 지난하지만 그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찾아오는 내담자들을 지원하고 상담하는 것과 달리 찾아가는 상담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렵다. 그래도 그만 둘 수 없는 건 우리가 가지 않으면 상담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직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이가 만든 상담시간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
아이가 만든 상담시간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

 

심리상담 수퍼비젼

 

매 주 전문가 선생님들을 모셔서 수퍼비젼을 한다. 오늘은 방문상담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해주셨던 정혜자 선생님이 수퍼비젼을 주신다.

방문상담원 선생님이 일 년이 넘도록 씨름하고 있는 아이. 엄마는 남편의 폭력에 못이겨 집을 나가고 알콜 중독 아빠와 둘이서만 지내왔던 8살 아이는 그동안 말도 표현도 없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이제야 조금씩 아팠던 마음과 숨겨진 분노가 행동이 아닌 말로 표현하고 있다. 언제 그 회복의 과정이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치유과정의 끝을 정하는 건 상담자가 아닌 아이들이다. “네가 좋아질 때까지,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함께 갈 거란다.” 어쩌면 우리가 아이에게 주는 건 그러한 믿음일지 모르겠다.

 

방문상담 사례회의

 

수퍼비젼 후에 방문상담사례회의가 이어졌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다 보니 놀이치료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사례관리를 맡고 있는 김윤정 상담원과 방문상담을 맡고 있는 김형옥 상담원이 함께 참석하여 방문상담원 선생님들과 논의를 한다. 상담하는 장소는 적절한 지, 보호자 상담이 필요한 지도 논의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논의하기도 한다.

오늘은 새로 방문상담을 시작하는 사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아이를 만나고 온 상담원 이야기로는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밖으로 도는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으시단다. 워낙 동네아저씨에게 피해가 있었으니 이대로라면 재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걱정이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일상생활을 돌봐주고 점검해줄 수 있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하교 후에 갈 공부방과 정기적으로 아이를 들여다봐 줄 수 있는 복지관을 알아보기로 했다. 성학대 피해를 경험한 아동이 앞으로도 성학대를 포함한 모든 학대로부터 안전하게 지역사회 안에서 보호받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우리의 일일 것이다.

 

 

금요일

 

상담소 사례회의, 동료 수퍼비젼

 

10시, 이번 주에 들어온 새 사례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례들을 함께 논의한다. 사례가 접수되면 사정면접 및 평가 이후에 개입계획을 세우고 법적지원이나 의료적 지원, 개인상담과 부모상담이 함께 진행되고 목표달성정도에 따라 종결이 결정된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사례회의에서 다루어진다. 이번 주에 들어온 사례는 모두 8사례. 피해자가 청소녀인 친족사례가 3사례, 집주인 할아버지가 월세방 아이를 수년간 추행해온 사례, 스토킹 사례 등 2시간이 넘게 어떻게 할 지 고민을 해보지만 참 쉽지가 않다. 각자 담당할 사례를 정하고 역할을 확인한다. 요즘 자살사건이 연이으면서 혹시나 위험 신호가 있는 내담자가 있는지 점검하고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한다. 아,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모임과 수퍼비젼, 회의 중간에 상담도 하고 행정업무도 처리하고 직원들끼리 모여 앉아 수다도 떤다. 이렇게 또 한 주가 간다.

쉬는 주말에 우리가 쉰다고 하여 성폭력 사건 또한 쉬지는 않겠지. 토요일, 일요일에도 방문상담과 개인상담은 지속되고 월요일 출근하면 또 다른 사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상담소 10년 동안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그럼에도 항상 부족하고 항상 어렵지만 또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걸어 나간다.

상담자가 믿지 않는 희망을, 운동가가 믿지 않는 미래를 그 누가 함께 가겠는가. 상담소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사회의 모든 진보적인 사회운동이 얼마나 한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법과 제도를 바꾸려는 투쟁이, 세상의 편견의 맞서려는 노력이, 내 이웃에 대한 관심과 봉사가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힘든 때도 있지만 그 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앉아 밥벌이도 하고 어려움을 함께하며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건 어쨌거나 행복한 일이다.

 

<글쓴이: 박가람>

쉼터에서 하는 일: 으랏차차, 샘동이!

쉼터 평화의 샘에는 10대의 청소녀들이 살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녀들은 그간 밖에서 수많은 상처와 시련을 겪고, 본인의 의지 조금에 거리상담원이나 유관기관들의 상당한 의지 혹은 강압이 더해져서 평화의 샘이라는 집으로 오게 된다.

평화의 샘에서는 입소된 청소녀들을 ‘샘동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살면서 그녀들의 마음이 샘처럼 마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그리하여 행여 지나가는 길손에게 시원한 물 한 그릇 먹고 쉬어가게 하는 여유도 생길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렇다면 평화의 샘 상담원들은? ‘샘지기’라 부른다. 맑은 샘물이 막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도록 퍼주는 사람, 가끔은 맑은 샘물로 목 한번 축이는 축복도 얻으리라는 마음에서이다.

 

샘동이들은 어떻게 생활할까?

샘지기들은 샘동이들을 위해 새로운 시작, 잘놀기, 잘살기 마지막으로 홀로서기의 계단을 만들었다. 샘동이들은 이 계단은 순서대로 오르지는 않는다. 시작계단에서 발끝을 내딛기도 전에 멈춰버리기도 하고, 어떤 계단에서는 엄두도 못 내고 좌절하여 뒷걸음치기도 한다. 어찌 보면 평지도 어려운 샘동이들에게 4단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가라 하다니 샘지기들은 욕심이 너무 많다 싶기도 하다.

자 그래도 각각의 계단을 밞아보자.

 

새로운 시작 (기본지원)

샘동이들은 많은 경우 적절한 양육을 받지 못한 채 가출을 한 후 평화의 샘에 들어온다. 그런 샘동이들에게 또 다른 샘동이나 샘지기들과 함께 하는 쉼터 생활은 또 다른 암초다. 생활규칙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외출금지나 인터넷금지와 같은 벌칙을 받기도 하고 반성문을 쓰기도 한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한 샘동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샘지기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통할 수 있는 벗과의 만남이다. 벗은 어른이기도 하고, 또래이기도 하며, 샘지기가 되기도 한다. 자원봉사 대학생이나 종교 활동에서 만난 신부님이나 수녀님, 목사님들은 샘동이들의 휼륭한 멘토이다. 꾸중하는 샘지기나 사이가 안 좋은 샘동이들을 맘껏 흉보고 속이 후련해져야 내가 정말 잘한 건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관계에서 받았던 배신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돌보게 된다.

 

  • 위기지원 : 수사동행, 소송 및 법률지원, 종합검진 및 의료지원, 위기상담 및 지원
  • 학업지원 : 복학, 검정고시, 1:1 학습지도
  • 멘토 멘티 실시를 통한 생활적응 향상 프로그램

 

 

잘놀기 (여가지원)

샘동이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유년의 추억이 많지 않다. 즐겁고 좋았던 기억보다 학대받은 기억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샘지기들은 샘동이들이 재미있게 잘 놀아야 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궁리를 많이 한다. 잘 논다는 것은 어울림, 이해, 수용, 인내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싸우다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갈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즐거워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식을 한 가지씩 해서 나눠먹고, 콘서트, 인근학교에 가서 운동도 함께 하고, 생일엔 푸짐하게 한상 차려서 즐기기도 하고, 방학엔 상담소 선생님들이랑 모두가 여행을 가며, 샘동이가 꼭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면 참여하여 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깟 생일상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샘지기들이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축하 해주니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았다 생각되며 행복해한다.

 

  • 하계 동계 캠프
  • 문화활동

 

해남 미황사 템플스테이. 2008년 여름캠프

 

잘살기 (전문지원)

샘동이들에게 일상에서 만나 상처나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어른들과 또래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고 싶다. 속마음을 감추면서 체하지 않고 툭 터놓고 세상 밖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지지받으며 살아가게 해주고 싶다.

이 계단에서 샘동이들은 자신만을 위한 시간들을 갖게 된다. 상담이나 성교육을 받게 되며, 샘동이의 기질과 능력 개발을 위한 검사들도 실시된다. 가족이 있다면 가족들도 챙김을 받게 된다. 샘지기들은 생활에서의 갈등과 관계의 어려움들을 같이 나누고 샘동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갈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부모와는 서두르지 않음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사회서비스를 적절히 받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검토하고 샘동이와의 관계에 접근한다.

지역사회의 도움은 각 과정 모두에서 도움을 받지만 특히 이 단계에서는 내부 자원의 한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전문가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 개별상담, 집단상담
  • 가족상담 및 가족지원서비스
  • 맞춤형 1:1 성교육

 

 

홀로 서기 (자립지원)

샘동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19세가 되면 평화의샘을 떠나 독립해야한다. 말이 독립이지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샘동이들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연관시설로 가거나 대학의 기숙사 정도에서 생활하게 되니 완전한 독립이라 할 수도 없고 평화의샘과 지속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살아간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지고, 꿈이 있어야 하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휴~우 어렵다.

이 과정을 위해서 샘동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본다. 빵을 만들고, 디자인을 배워보고, 컴퓨터를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학교가 안될 때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글쓰기, 춤 무엇이든지 시도하고 부딪쳐 보는 거다. 아르바이트도 한다. 일하는 게 힘들고 사장님이 무서워도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준비 과정이다. 이 과정을 위해서는 정 힘들 때 잡아줄 끈이 있어야 한다고 샘지기들은 생각한다. 샘동이들이 평화의 샘을 떠난다 하더라도 즐거우나, 슬프나 찾아와 따듯한 밥 한 끼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Home Coming Day는 홀로선 샘동이들이 동생들 주라며 없는 돈 털어 먹을 것 사들고 집으로 오는 날이다. 찬 없는 밥이라도 맛나게 먹고 동생들을 도닥이며 홀로설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날이다.

 

  • 경제교육, 취업기회 지원
  • 자격증 취득 교육
  • 자립금 지원

 

‘내 꿈은 뭘까?’ 평화의 샘 담벼락에 그려본 희망